"할아버지와 고모님 행적을 대한민국에서 인정받길 원합니다." ... 중국동포 문명호, 문명전 형제 인터뷰

 

[서울=EKW이코리아월드] 2020815, 광복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36년이라는 기나 긴 암흑의 시간, 일제로부터 민족말살이라는 혹독한 탄압으로 본토를 떠나 해외에서 민족부흥과 독립, 광복을 꿈꾸며 일제에 저항하다 희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드디어 1945815일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광복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다. 그러나 해방 75주년이 되었지만, 조국이 해방되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무명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198월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포상을 받은 인사는 15,931, 그러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지만 후손을 찾지 못한 서훈 미전수자가 5,947명에 이른다. 서훈 미전수자 중 중국지역에서 활동한 인사가 1천여명으로 가장 많다. 그나마 국가보훈처에 이름이라도 올려져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중국 현지에는 마을사람들 이야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가족사에는 분명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 당시 역사적 자료가 없거나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자료가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뜻깊은 8. 15 광복절을 맞아벌써 7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어느 항일독립운동가의 가족사를 들려주고자 한다.

문창주의 친손자 문명호(사진 우)와 문명전(사진 좌)
문창주의 친손자 문명호(사진 우)와 문명전(사진 좌)

지난 7월 중국 길림성 화룡에서 온 중국동포 문명호(1953년생), 문명전(1956년생) 두 형제를 최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식당가에서 만났다.

할아버지와 고모님이 일제에 맞서 항일독립운동을 열심히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한국에서도 이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며 연변일보에 게재된 글과 서류 등을 내보이며 할아버지와 고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문창주’, 고모 이름은 문두찬’.

두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연변일보 최근호에 게재된 글을 또다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연변일보 인터넷판 최근호에 캡쳐
연변일보 인터넷판 최근호에 캡쳐

연변일보는 조선족혁명투쟁사 우리 민족의 영웅들 이야기를 연재했다. 2019311일자에는 이름 난 항일녀성 영웅 문두찬’, 2020622일자에는 장인강 항일원로 문창주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 글은 중국지역에서 항일운동가를 찾아 현지 답사, 마을 사람, 가족의 증언 등을 직접 듣고 조사 연구하며 평생 글을 써온 조선족 역사학자이광인 교수가 쓴 글이다.

이 두 글을 읽으면서, 일제시기 항일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했는지 느끼게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 가족의 눈물짓게 하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가슴이 멍해질 뿐이다.

문창주는 함경북도 종성군 출생으로 1906년 연변으로 이주,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항일독립운동가로 활동해 오다 1929년 실종되어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 당시 일본군경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문창주는 특별히 무장독립군 홍범도 장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조선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4개 언어에 능통해 중국연변과 러시아 연해주를 왕래하며 종횡무진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문통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아내 김옥수 여사가 먼저 사망하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해 아이 둘을 데리고 겨울 산중으로 피신해 생활하던 중 심한 동상과 남편을 쫓는 일본순사의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당시 두 어린 자녀는 문두찬(여, 1912년생)과 문두만(남, 1917년생)을 남기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야만 했다. 문두만이 바로 지난 7월 만나게 된 문명호, 문명전 두 형제의 친아버지이다.

문두찬과 문두만은 셋째 삼촌 문창렬 부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문두찬은 부모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이 투철했고 공산당원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3120세 때 감옥생활도 1년 3개월 간 하고, 1932년 일본군에 의해 오막살이 집에 감금되어 불타 산화했다. 이 당시 연길 감옥에서 출산한 젖먹이 아이도 함께 불에 타 사망을 해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를 말해준다.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맡게 된 문창주 일가의 가족사이제서야 비로소 그의 친손주 문명호, 문명전 두 형제에 의해 한국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문창주 할아버지와 문두찬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문명호씨  
문창주 할아버지와 문두찬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문명호씨  

 "할아버지 문창주는 4개 국어에 능통하셔서 ... 연변과 연해주를 넘나들며 홍범도 장군 등을 지원하며 항일운동에 앞장 섰고, 고모 문두찬은 20세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한국의 '유관순' 같은 존재이죠"

 

문명호 씨는 말한다.

저희 할아버지(문창주)와 할머니(김옥수), 고모(문두찬)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문두만)와 어머니(이순선), 셋째 할아버지(문창렬), 할머니 그리고 큰 형님과 고향 어르신들 한테서 수없이 들은 이야기들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희가 소학교 때 투도구 주위 마을의 여러 개 학교와 촌마을을 순회하면서 조부님으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문씨 가문의 피에 젖은 항일독립운동 투쟁사를 강연하셨습니다.”.

문명호 씨의 아버지 문두만은 1936년 적후비밀자위대를 구성해 활동한 공적을 인정 받아 해방 후 중국에서 화룡현 투도구 정부 민정 겸 무력부 부장으로 승직까지 했지만, 1963년 직장 상사와의 갈등으로 억울하게 사망하였다고 한다.

고모님(문두찬)은 중국정부로부터 항일여성렬사로 인정받았지만, 할아버지(문창주)는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서 한생 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생전에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 고국땅에 모시는 것이 소원이셨는데, 아버지도 너무 일찍, 저희가 열 살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저희 후대들이 할아버지 유해는 찾지 못해도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신 그 공로를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아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모님과 아버지, 어머님에게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중국동포 문명호, 문명전 두 형제의 절규와 같은 호소였다.

이광인 교수가 연변일보에 게재한 글을 토대로 문씨 일가의 행적을 다시 정리해본다.


문창주(文昌周, 1885-?) -장인강 항일원로


1885년 함경북도 종성군 출생

(문수철의 5형제 중 맏아들, 종성과 회령 일대의 이름난 학자형 출신으로서 력사상 함북 오룡천 5현과 이주 후 두만강 이북 명동의 남씨, 문씨, 김씨, 윤씨 등 5대가족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였다. 18992월 김약연 김씨, 문씨 등 4대 가족 25세대 140 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연변 용정 명동으로 이주하였다.)

1906년 연길현 수신향(守信乡)으로 불리운 장인강 도대구(长仁江倒大沟)로 이사하였다.

(문창주는 항일운동가 출신 아버지 문수철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였고 구변술이 뛰여나고 애국심으로 불타올랐다면 아버지 문씨는 그 시절 항일운동가들인 홍범도(洪范图)와 리승훈과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열렬한 항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712월에 반일지사 남강 리승훈(南岗李升薰)이 평북 정주군에 4년제 중등과정의 학교를 세우자 문창주는 아버지의 지시로 평북 정주로 달려가 오산학교(五山学校)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장인강으로 돌아온 후에는 반일운동가인 아버지의 후원으로 장인골 어구 마을에 학당과 교당을 꾸리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기여했다.

1909년 종성군 아가면 출신 김옥수(金玉秀)와 결혼식을 올린 후 아버지의 주선으로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홍범도 장군의 수하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섰다.

(문창주는 조선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4개국 언어를 정통한 열렬한 반일운동가로 정평이 났다. 연변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홍범도 반일부대의 이름난 '문통사'로 거듭났다.

1910년 전후 그 시절 홍범도는 때론 연해주 땅에서 때론 조선국내 진격작전을 벌리기도 하고 때론 만주로 불리우는 동북 안도현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라 문창주는 홍범도와의 배합전선으로 자기의 활동무대를 연길현과 화룡현, 안도현 등지로 옮기고 선교사의 신분으로, 학당교사 신분으로, 장사군의 신분으로 투도구와 이도구 삼도구, 룡정, 국자가, 개산툰, 안도 등지를 다니면서 반일연설과 친일주구 조사와 청산활동, 반일부대 후원사업을 벌리였다.)

19134월 간민회 총회 화룡지회 투도구지역 책임을 맡았다.

(국자가에서 항일운동가 김약연, 리동춘 등을 중심으로 하는 간민회가 조직되였다. 문창주는 간민회 총회의 취지에 따라 투도구지역내 조선이주민의 귀화입적운동, 사숙개량운동, 사립학교운동, 반일운동 펼쳤다. 이때 투도령사분관 경찰서에 두번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4년 봄, 반일무장투쟁 태평구사관학교 설립과 학생모집에 발벗고 나섰다

(리동휘와 그의 동지들이 왕청현 라자구에 가서 반일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태평구사관학교를 세우자 문창주는 달라자 명동학교와 손잡고 사관학교 학생모집에 발벗고 나섰다.

태평구사관학교가 경제적 원인으로 몇달 꾸리고 못하고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흩어지자, 리동휘의 동지인 구춘선 등을 중심으로 연변의 항일운동단체 국민회가 결성되여 활약, 문창주는 또 장인강과 주변 마을 조선인들을 묶어세우면서 국민회를 받들어 나섰다. 안무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회 산하의 국민회군은 후일 유명한 청산리대첩의 중요한 한갈래 조선인 항일무장이였다.)

19193, 연변 룡정 3.13반일운동에 아버지와 함께 장인강과 그 일대 군중 수십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

19206월 봉오동 전투, 10월 청산리 전투 시 홍범도부대 군자금 모금과 지원사업을 펼쳤다.

(192010월 청산리전투가 끝나고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로 전이한 다음 문창주는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 반일운동을 전개하였고, 12월 문창주 아내 김옥수와 두 어린 자녀(문두찬, 문두만)은 산중 동굴에 피신해 생활을 하였다. 김옥수는 심한 동상과 일본군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이 사망하게 되었고 문창주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문두찬 (文斗燦 1912-1932) - 연변의 항일녀성 열사  


 

불에 타 산화한 문두찬 모녀, 1932년 연길감옥에서 나온 문두찬은 감옥에서 낳은 갓난아이를 안고 아버지가 살던 오두막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일본군은 출옥한 문두찬을 또다시 찾아와 심문하고 총칼로 위협을 가하고, 일본으로 귀순할 것을 강요하였다. 끝내 거절하니 아이가 죽어도 좋으냐며  협박하였고 이에 굴하지 않자, 집에 감금한 채로 불을 질러 아이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당시 상황을 표현한 홍색장인강주제 화랑에 걸린 그림이다.  -가족들의 증언 
불에 타 산화한 문두찬 모녀, 1932년 연길감옥에서 나온 문두찬은 감옥에서 낳은 갓난아이를 안고 아버지가 살던 오두막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일본군은 출옥한 문두찬을 또다시 찾아와 심문하고 총칼로 위협을 가하고, 일본으로 귀순할 것을 강요하였다. 끝내 거절하니 아이가 죽어도 좋으냐며  협박하였고 이에 굴하지 않자, 집에 감금한 채로 불을 질러 아이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당시 상황을 표현한 홍색장인강주제 화랑에 걸린 그림이다.  -가족들의 증언 

 

9세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문창주는 1929년 실종되어 소식이 끊겼다.

셋째 삼촌 문창렬과 전근숙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게 된 문두찬과 문두만, 역시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항일정신이 높았다. 문두찬은 20세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불 태워 죽게 되는 비극을 보게 된다. 문두찬의 이야기도 이광인 교수의 글을 토대로 정리해 본다.

1912년 아버지 문창주- 어머니 김옥수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남, 남동생 문두만(1917년생)

(문두찬은 소학교 졸업을 앞두고 한 마을의 리영희와 자유약혼을 했다.)

19303, 6년제 사립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리씨댁 며느리로 들어갔다.

19306월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장인강 봉의동공청단지부 선전위원 책임과 봉의동부녀회 회장을 맡았다.

1930720일경 공청단평강구위 소선대 총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307월말에 평강구유격대가 강건너 조의구(朝义沟) 산속에서 조직되였다. 시동생 리구희도 구유격대원으로 되였는데 이름은 로농홍군이라 불리였다. 대외로는 연화유격대로 통하였다. 8월초에 이 유격대는 군사총지휘 신춘의 인솔하에 장인강일대를 떠나 골안치기를 넘어 도목구(倒木沟) 일대로 전이하게 되였다. 문두찬은 부녀회원들과 함께 밥과 채를 해가지고 함지 등에 담아 이고 유격대가 머무르고 있는 남산으로 들어갔다.)

1931년 봄, 문두찬은 일본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연길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 옥중에는 문두찬과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 김영신, 김정길 등 8명의 녀성혁명가들이 갇히였다. 문두찬은 3년 형을 언도받았고 옥중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사랑스런 여아였다.)

19323월 만주국이 서면서 여러 여성혁명가들과 함께 특사령으로 풀려났다.

 

조선족역사학자 이광인 교수
조선족역사학자 이광인 교수

이광인 교수는 중국 길림성 화룡시 태생이며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후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를 거쳐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 교수는 평생 두발로 현지 답사를 뛰며 직접 조사 연구한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30부 가까이 되는 저서를 펴냈으며 이 중 겨레 항일지사들 (6),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2), 광복전 겨레 작가론, 시인 윤동주 인생려정 연구, 홍군장령 양림(평전), 백포 서일장군(평전), 최음파 평전, 무정장군(평전) 등이 대표작에 속한다.

이 중 '홍군장령 양림(평전)'은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에 선정, “연변작가협회실화문학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무정장군(평전)'은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소수민족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밖에 이 교수는 일찍이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문두찬의 옥중일기


문두찬은 19313년 형을 언도받고 연길 감옥 생활을 한다. 1932년 특사령으로 풀려날 때까지 13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일기를 남겼다. 그 일기는 남동생 문두만과 가족에 의해 1967년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불에 태워졌다고 한다. 문명호씨는 고모 문두찬의 옥중일기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할아버지와 고모의 항일독립운동을 대한민국에서 인정받기 위해 천안 독립기념관도 찾아가고 항일독립운동가를 연구하시는 교수님들도 찾아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일제시기 감옥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개 유언장이나 옥중일기를 남긴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맞아요, 저희 고모님도 일기를 남기셨어요.’ 대답했습니다. 어머니(이순선)1964년부터 항일운동을 한 우리 가족사 강연을 하러 다니셨는데, 고모님이 쓴 옥중일기 내용을 이야기 하셨고, 큰 누이(문명해)1967년 강연 할 때 고모님 옥중일기 내용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래서 문두찬의 옥중일기는 큰 누이 문명해의 기억과 당시 강연노트에 메모해 둔 내용을 토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문명호씨가 보내준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옥중일기]

오늘 놈들은 해산일을 10여일 앞둔 나에게 귀순하라고 재차 권고한다. 귀순하면 당장 석방시킬터니 집에가서 애기의 순리로운 출산도 보장되고 너도 안심하고 애를 키울수 있을거 아니냐 난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너 이년 혁명이 너 새끼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나에겐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는게 제일 중요하다.

 

[옥중 일기]

아가야 오늘 어느새 네가 감옥에서 태여난 지 100일이 되었구나. 그 동안 고생이 많았지. 이 엄마와 여러 이모들과 함께 끝까지 씩씩하게 살아가자. 오라지 않으면 새날이 밝아 올거다. 그런데 아가야 혹시라도 혹시라도 말이야 이 엄마가 갑자기 너를 지키지 못하고 어느 날 떠날수도 있을거다. 죄송하지만 그래도 넌 이 엄마를 원망하지 말아다오. 엄마의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네가 나중에 커서 이 엄마가 걷던 길을 걷게 되는 모습을 볼거다. 사랑한다.

 

[옥중 일기]

아침에 아기는 안 나오는 젖을 힘 없이 빨다가 또 울어댄다. 영신 언니는 자기밥 그릇을 나에게 밀어 놓으며 너 많이 먹어야 젖이 생길거 아니냐 나는 눈물을 삼키며 모래알 같은 밥알을 씹구씹다가 아기 입에 넣어 주었다. 아기는 다행히도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다가 삼킨다.

그래 이거라도 먹어야 살지 놈들은 철창너머로 귀웃거리며 이러다 내가 못 버티고 손들기를 바란다. 어림도 없지 우리 아기는 죽지 않을거다 ....

 

[옥중 일기]

놈들은 나에게 갖은 형벌을 다 가하였다. 심장을 도려내고 뼈와 살이 베여지는 고통, 때로는 내가 이렇게 가는구나 하고 생명의 순간을 느낄 때가 몇 번인지 모른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습관이 되였고 이젠 죽음이 무섭지 않다. 아쉬움이 있다면 해방된 후 고국 땅에 가보지 못하는 것 뿐이다.

 

[옥중 일기]

두만아 난 어제밤 꿈에 엄마하고 아빠를 보았다. 그렇게 그립고 그립던 엄마와 아빠를 보니 어찌나 행복하던지 아빠가 니가 어렸을 때 하시던 말이 기억나니. 아빠가 살던 고향은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은 서울 지나 남쪽 광주쪽 바다가 멀지 않은 곳, 겨울에도 여기처럼 춥지 않고 봄처럼 따스한 곳. 아버지는 해방이 되면 너와 나 손잡고 같이 고향 땅을 구경시킬테다 라고 하시면서 혹시라도 나 죽고 니들이 크면 가보라고 하셨지...내가 못가면 후에 너라도 꼭 가 보거라.

 

[옥중일기]

동생 두만에게

두만아 너도 이젠 14살이구나

아버지가 실종된지 1년이 넘었으니까 이미 어디에서인가 놈들한테 살해된거 확실하다.

너 오라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될거니까 절대로 나약해지면 안돼

용감해야한다. 기억하거라 너 세살에 나와 엄마 셋이 동굴에 피신해 있을때 어머니가 놈들한테 피살되였고 아버지도 살해된게 분명하다.

너 알지만 나도 꼭 어느 때인가는 아빠 엄마처럼 놈들에게 살해될거다.

나는 나의 보귀한 생명을 죽는 순간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다 바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 두만아 너도 아빠 엄마에게 부끄럽지 않는 훌륭한 아들로 민족해방 혁명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그리고 부탁한다. 나중에라도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찿으면 엄마의 묘지에 같이 모셔라

 

현재 문두찬은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 접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창주에 대한 기록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5개 항목에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명단과 함께 이름 정도가 있을 뿐이다.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신청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상태이다.

중국 연변박물관에는 문창주가 사용한 책상과 물주전자가 유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후에 딸 문두찬이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1929년 실종되어 생사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항일독립운동가 문창주,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리고 문명호, 문명전 두 형제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2020815일 광복절을 맞는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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