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에서 남편과 함께 일한 중국동포와 인연으로 가리봉동에서 제2의 인생

가리봉동에서 최초로 중국식품점을 개업한 조순희 씨가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가리봉동에서 최초로 중국식품점을 개업한 조순희 씨가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가 여기 처음 와서 장사를 시작하니까 나를 중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개업식 할 때요"


<본문은 2018년 가리봉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서울시, 구로구 지원)에 참가한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 임영상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주동완(재미동포, 코리아리서치 원장)이 합동취재하고 주동완 원장이 작성하여, 가리봉사람이야기(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제
2의 인생길

 

조순희는 전라북도 남원이 고향인데 21살이 되던 해인 1970년대 말에 상경하여 결혼과 함께 개봉동에서 거주하다가 199812월에 가리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녀가 가리봉동을 알게 된 것은 가리봉동으로 이사하기 한 해 전이었다. 1997년도에 IMF의 여파로 남펀이 하던 사업을 그만 두고 여기저기 건축일을 하러 다닐 때였다고 한다. 그 때 남편이 건축공사장에서 중국동포를 한 사람 알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친해져서 친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 중국동포가 남편이 답답해하는 사정을 듣고 같이 중국여행이나 하자면서 자신의 고향인 흑룡강성 가목사로 안내했다. 남편도 기분전환 겸해서 그 중국동포 친구를 따라 나섰는데, 그 길이 그들 부부의 제2의 인생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조순희의 남편은 19971월에 흑룡강성 가목사라는 곳을 둘러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도 이렇게 많은 한민족이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남편이 또 하나 유심히 본 것은 중국동포들의 밥상에 매 끼니때마다 올라오는 두부요리였다. 두부라고는 하는데 종잇장처럼 얇게 만들어, 가늘게 썬 후 양념에 무쳐 독특한 맛을 내는데, 이 두부요리를 중국동포들은 항상 즐겨 먹었다. 건두부였다.

 

건두부요리와 조순희씨 건두부공장
건두부요리와 조순희씨 건두부공장

 

조순희는 남편에게 들은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 그걸로 뭐 볶아서도 주고, 쌈도 싸 먹고 또 뭐 여러 가지 요리를 해서 그 두부 하나로... 귀한 손님이 와도 무슨 잔칫상에도 항상 저거는 빠지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 가서 김치를 먹듯이. 그러니까 이건 제가 들은 얘기예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물으니깐 두부라는 거예요 두부. 이거는 없어서는 안 될 거라는 거예요 우리 뭐... 간장이나 김치 올라가듯이 어떤 큰 상에나 작은 상에나 무조건 기본으로 올라가는 식품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사업을 했던 조순희 남편은 그 건두부를 보자마자 그의 사업기질이 발동됐다. 그래서 그러면 이거를 한국에다 하면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중국동포 친구한테 물어보니까 하면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그들 부부는 이게 그때는 솔직히 잘 되리라는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 때만 해도 중국동포들이 들어왔어도 여행이나 친척방문 같이 단기체류로 들어온 사람들이나 많았지 아주 살러 온 사람은 많지 않다고 느껴졌을 때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남편이 중국을 다녀온 이후로 계속 건두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고민고민하던 끝에 결국 건두부를 만드는 공장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우선 건두부 공장 장소를 물색했는데 당시 가리봉에 중국동포들이 군데군데 산다는 얘기를 듣고, 마침 가리봉동에 살면서 동네 통장 일을 보고 있던 중학교 동창생에게 싼 가게 자리를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동창생이 얻어준 자리는 지금 영일초등학교가 있는 근처였다. 건두부 공장을 차릴 가게 장소가 마련되자 부랴부랴 두부 만드는 기계 등을 구입해서 7~8월에 두부공장을 차렸다. 정말 생각지도 않은 두부공장을 6개월 만에 차리고 두부공장 사장부부가 됐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먹어 본 적이 없는 건두부 공장.

정말 얼떨결에 건두부 공장을 차린 그들 부부는, 아직 개봉동에 살면서 가리봉동으로 출퇴근하며 매일 자신들의 건두부 공장에서 건두부 만드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보기보다 건두부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콩을 갈아 가능한 한 얇게 두부를 만들어야 하는데, 두부를 얇게 밀다 보면 반죽 가운데 구멍이 나거나 가장자리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2,3개월을 건두부 만드는 연습을 한 후에 추석을 맞이했다.

조순희 씨 생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과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대표
조순희 씨 생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과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대표

 

그 당시 그들 부부의 건두부 공장이 들어선 영일초등학교 주변은 구로공단의 폐쇄와 함께 공장과 노동자들은 모두 떠난 상태였고 중국동포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고 한다.
 
그 때 영일초등학교 주변에는 중국동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조금씩 조금씩은 있었죠. 여기 공단이 다 떠났잖아요. 그때 그리고 나서 여기도 쪽방촌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빈집이 굉장히 많았어요. 방 하나, 부엌 하나 그런 집이... 옛날 공단 직원들이 살던 집들이에요. 우리가 가게를 싼 데를 찾다 보니까 여기다 얻었는데... 중국동포들도 방을 얻으러 다니다 보니까 이 동네가 싼 거죠. 그러니까 한 명, 두 명씩 저희 가게 근처에 방을 얻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두부 공장이 있던 그 영일초등학교 앞에 다세대 주택이 굉장히 많은데, 그 쪽부터 중국동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그러다가 점차적으로 내려와 가지고, 측백나무 건너편에, 그러니까 고가 건너편에 굴다리 건너가서 (점점 중국동포들의 거주지가 확대되었지요.)”

 

그때 당시에 여기 방값이 몇 십만 원 했어요, 그냥 월세만도 있었고... 50만원에 8만원? 10만원대... 거의 그렇게 방이 되어 있었으니깐... 방 하나에 두 명, 세 명씩...” 조순희는 당시 영일초등학교 근처에 살던 중국동포들의 거주실태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너무 거리가 더러워서... 정말 더러웠잖아요... 너무 난잡했어요.”라고 그 당시 거주환경을 이야기하는데 그녀의 인상마저 찌그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건두부 공장은 첫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게 생각지도 않은 대박이 터졌다. 조순희는 두부공장을 차리고 처음 맞이한 1997년 추석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제 두부를 만드니까 콩냄새 같은 거나 나죠, 그 냄새가 밖으로 막 퍼지는 거예요. 중국동포들이 건두부를 거기서 눈으로 보잖아요. 거기 사는 사람들이 이게 소문이 나니까 엄청나게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었어요.”
당시에는 한국에 건두부를 만드는 곳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녀는, “없었죠. 없었어요. 우리 하나였어요. 그런데 소문이 나니까 아주 제주도, 거제도에서 엄청나게...” 왔다고 한다. “(건두부 만드는 것을) 연습을 했는데, 그 때는 기계가 다 수동이었어요. 수동이니까 손으로 다 콩을 떠보고, 손으로 뜯고 하니까 미처 사람들을 대주지 못했어요. 줄을 서서 표를 나눠줘야 될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양이 그렇게 많이 나가지 못 했죠 수동이라서... 빨리빨리 못 해주니깐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지고 높게 올라가는 것을 보니 지금도 그 때 건두부를 빨리빨리 많이 만들어 내지 못 한 것이 아쉬운 듯하다.

 

한국에서 고향의 건두부 맛을 본 중국동포들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건두부를 만든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조순희는 “(건두부 만든 것을) 배웠죠. 하지만 처음에는 잘 안 돼서 재료를 많이 버렸죠. 추석까지도 거의 완성품이 제대로 안 된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게 귀하잖아요. 이게 고향 음식이... 여기서 생산 한다는게 생각도 못했는데 그게 있으니깐... 그때는 뭐, 지금 같으면 하나라도 조금만 찢어진 거 있어도 안 가져갈라고 그러지만, 그때는 찢어진 게 어디가 있어요...?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가져가야 할 판인데... 5kg달라하면 2.5kg 주고, 2kg달라고 하면 500gram 주고... 이런 식으로 전부 다 배분했죠. 대기표를 나눠주고... 그렇게 해서 이거를 팔아서 추석이 지났어요. 다음 해 설 때 되니까 그 배로 사람이 몰리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중국식품들도 찾는 거예요. 어휴 그땐 진짜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나가는 택시들도 도대체 저게 뭔가 하고 줄을 서서 그걸 보았어요

 

가리봉동의 주민이 되어... 중국식품을 열다

 

건두부 공장이 예상외로 잘 운영이 되자 조순희 부부는 다음 해에 아예 가리봉동으로 이사를 와버렸다. 건두부와 함께 건두부 공장 옆에 조금씩 갖다 놓은 다른 중국식품들을 찾는 중국동포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신기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게 건두부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건두부 사러왔다가 중국식품이 있는 것을 보고 중국동포들이 자기네 고향 식품들도 먹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아예 어떤 어떤 중국식품도 가져오면 안 되겠느냐?’하고 자기들이 먹었던 중국의 중국동포 식품들을 요청하는 거에요.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가져 왔죠.”

 

건두부 공장 옆에다가 중국식품들을 놓고 대충 진열해서 팔았는데 설이 되니까 물건이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5,000만원어치만 사다놔도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1억이 아니라 2억 원어치도 돈만 있어서 중국식품을 사다 놓으면 될 거 같이 그렇게 소비량이 많아지는 거예요. 건두부 공장 뒤에다가 창고를 얻어서 물건을 쌓아 놨는데, 동네사람들이 짐 쌓아 놓은 것을 구경하러 나올 정도였어요.” 이어 조순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니까 저게 도대체 뭐 길래 저렇게들 난리인가 싶었다.”그래서 중국식품을 유통하기 시작했어요. 제대로. 그때는 불법이죠. 보따리 장사를 한 거죠. 보따리 장사 몇 명을 만들어 가지고 돈을 줘서 중국에 가서 물건을 해 와라 해서 물건을 가져왔는데... 이러다 보니까 제가 이제 가게를 가리봉동에다 하나 차려야겠다 하는 생각이 든거죠.”
라며 중국식품 가게를 열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그래서 중국식품점을 열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가게 자리를 보러 다니던 중, 현재 운영하고 있는 중국식품점 가게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가게 자리를 얻었다고 한다. “전파사를 했던 모양인데 그 때 여기 올 때는 뭐 아무 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당시에는 가게도 집도 많이 비어 있는 상태였고 또 우리가 그때 돈도 많이 없으니까 이제 이런 데를 찾았죠. 싼 곳... 가게를 싸게 얻을 수 있는 곳. 800만원 보증금에 45만원 월세로.. 지금은 2,000만원에 월세 160만원이에요. 많이 올랐죠.” 이렇게 하여 1998, 건두부 공장을 연 지 1년 만에 그리고 가리봉동에 이주해 들어온 해에 중국식품을 파는 가게까지 열게 되었고, 이름도 중국식품이라고 크게 빨간 글씨로 쓴 간판을 내걸었다.

 

현재 조순희 사장이 운영하는 중국식품은 개업 당시의 두 배 크기라고 한다. 가리봉 우마길에 들어서서 첫 번째 골목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처음에는 한 칸만을 세내어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의 중국식품점이 문을 열었다니까 중국동포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금방 가게가 잘 되어, 옆 가게까지 세를 얻어 금방 두 칸으로 늘렸다고 한다. 조 사장의 중국식품점에는 중국 연변에 있는 중국동포 가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중국동포들이 즐겨 먹는 각종 식품과 중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중국산 주류들이 매장 구석구석 꽉 차있다.

 

건두부 공장과 중국식품점을 연이어 개업한 조순희 사장 부부에게 19971998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건두부공장과 중국식품 두 가게 매상은 날로 증가하였지만, 국가적으로 IMF를 당해 남들은 실직되어 돈을 벌지 못하는 때라 장사가 잘 되는 기쁨을 밖으로 내보일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남편은 열심히 건두부를 만들고, 조 사장은 중국식품을 들여다가 팔았다. 이렇게 활기차게 가리봉동 생활을 시작한 그들 부부는 내친 김에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비즈니스를 원 없이 해보기로 작정했다. 건두부 공장과 중국식품점에 오는 중국동포들을 가만히 보니까 그들 고향음식을 상당히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같은 한민족이라고 해도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아왔고, 또 중국과 중국인이라는 거대한 나라와 국민의 일원으로 살아오면서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중국동포들의 입맛은 이미 한국인들의 입맛과는 달랐다. 그 점을 간파한 부부는 1999년에 중국동포들을 위한 로췌반점라는 중국동포 식당을 열었다. 로췌반점은 우마길 입구 가리봉 삼거리에서 지금의 남부순환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있는 쪽으로 가는 길에 자리 잡았다. 가리봉동에 중국동포 음식점이 없던 시절에 중국동포들을 위한 로췌반점이 문을 열자 많은 중국동포들이 찾아와 그들 고향의 음식 맛을 즐겼다. 문제는 건두부 공장이 있는 영일초등학교와 중국식품 가게가 있는 우마길까지는 거의 1 Km이상 떨어져 있어서 서로 오가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2000년 들어서면서 아예 건두부 공장도 중국식품점이 있는 바로 옆길로 옮겼다. 그리고 그 때쯤 많은 중국동포들이 가리봉동으로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그 때 당시를 조순희 사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벌써 저 쪽에 삼거리에 딱 들어오면 향신료 냄새가 막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게 고향냄새잖아요. 고향에서 맡았던 그 냄새를 막 맡으니까... 참 좋아들 하고...”

가리봉에서 고향의 냄새와 맛에 취한 중국동포들의 고향 식품을 구입하느라 씀씀이가 컸다. 당시 중국동포들이 쓰는 돈에 대해, 조 사장은 그 때는 중국동포 열 명 매상이 지금 300명의 매상과 맞먹었다고 한다. 특히 그 때는 중국동포들이 대부분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아 한 번에 많은 양을 구매했다고 한다. 단속이 심하지 않은 주말을 이용해서 가리봉에 사는 친척,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와서는 1~2주치 식품을 한꺼번에 구입해가는 바람에 매상이 금방금방 올랐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동포들끼리 서로서로 가리봉에 가면 중국에서 먹던 건두부와 중국식품들 그리고 식당까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려 저절로 가게들의 홍보가 되어서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조순희 사장은 돈방서에 앉은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여기서 장사를 하니깐 너무 잘되는 거예요. 설을 한 번 지내니까 너무 잘 돼요. 그러니까 저기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날 별로 안 좋아하죠. 1998년도부터 2000년 까지 IMF 때문에... 이제 이게 2001년도부터 풀리기 시작했는데... IMF때 사람들은 다 파리 날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 손님들이 줄을 서있는 것이에요. 가게도 작은데. 엄청나게 사람들이 많았어요. 진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어요. 난 애기 둘을 데리고 와서 우유 먹이면서... 둘을 키우면서 장사를 했는데, 화장실 갈 시간도 안주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장사 안 되는데 우리 집만 장사 잘되니깐 다 안 좋아하는 거예요.

 

이렇게 건두부 공장, 중국식품, 로췌반점 등 3 가게가 가리봉으로 밀려드는 중국동포들 덕분에 잘 운영이 되었다. 조 사장은 로췌반점을 개업할 때 겪은 해프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주었다.
 
가게 주변의 한국 상인들을 모셔 놓고 개업식을 했는데, 저는 중국식품을 취급하고 있고, 또 한국 사람들은 중국동포들의 요리를 먹을 기회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나는 더 잘 대접해준다고 좋게 생각해서 우리 식당에서 중국동포 요리를 해서 개업식 때 대접을 했는데 우리가 초대한 이 근처 시장의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안 먹는 거예요. 아무도 안 먹어... 더럽게 생각하고 아무도 안 먹어. 그래서 우리 집 아저씨가 나한테 전화 와서 왜 이런 거로 대접 했냐고 난리를 쳐요. 그래서 다시 아귀찜이라던가 뭐 꽃게탕 그것들을 다시 시켜가지고 대접했어요.”

 

초창기 한국인들의 중국음식에 대한 혐오정도는 아주 심했다고 한다. 조 사장은 한국인들의 중국음식에 대해 갖고 있었던 혐오감정에 대해 직접 경험한 사실을 이렇게 털어놨다.
중국동포들은 번데기를 팔아도 살아있는 걸 갖다가 팔았잖아요. 그럼 한국 사람들은 무슨 저런 더러운 것을 파나, 저게 뭐야라고 하고 내가 손으로 만져서 줘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썅차이따료’, ‘화룡같이 독특한 냄새가 나는 향료가 들어간 음식의 냄새를 되게 싫어했어요.”

조순희 사장이 중국동포들을 위한 비즈니스를 3개나 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중국동포가 아니냐 하는 웃지 못 할 오해와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차별의식도 있었다.
 
, 근데 제가 여기 처음 와서 장사를 시작하니까 나를 중국 사람인 줄 알았어요. 개업식 할 때요... 그때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죠. 처음 여기 들어왔으니깐 사람들도 알아야 되잖아요. 난 내가 한국 사람이니깐 커피 같은 것을 타서 같이 마시려고 사람들에게 커피를 타주면 안 먹는다고 그러는 것에요. 내가 중국 사람이니깐 더러워서... 내가 느끼기에 그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깐 여기서 세탁소 하시는 분도 사람들과 나를 놓고 내기를 한 거예요. ‘저 사람이 중국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하고. 지금 저기 저의 가게 앞에 계신 분 같은 경우는 저하고 빨리 가까워졌기 때문에 집도 가깝고 가게도 바로 앞이고 하니까... 그리고 일상생활 얘기를 하다보니까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죠. 그래서 앞 가게 주인이 저를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아니면 우리 남편이 화교라고 하든가... 좌우간 우리 부부 둘 중 누구 하나는 중국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아니라고 하고 다 오리지널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막 내기를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처음엔 말도 못하지, 별로 아는 사람도 없지, 얘기 할 데도 없지, 어디 나가지도 못 하는 것이에요. 이상하게 보니까. 나를 중국 사람인 줄 알고, 나 혼자만 장사 잘되고 그러니까 밖에를 못 나갔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

 

지난해 말 개관한 가족통합센터로 이어지는 골목길 확장공사로 인해 조순희 씨가 운영하는 중국식품점도 5월말까지만 영업을 하고 중단하게 된다. 가리봉동에서 최초로 설립한 중국식품점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해 말 개관한 가족통합센터로 이어지는 골목길 확장공사로 인해 조순희 씨가 운영하는 중국식품점도 5월말까지만 영업을 하고 중단하게 된다. 가리봉동에서 최초로 설립한 중국식품점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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