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부터 줄곧 17년동안 중국동포 관련 신문을 발행해 온 이유

"한국인이에요. 어떻게 중국동포에 관심 갖고 활동하게 되었어요?"

내가 낯선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 의례적으로 듣는 질문이다.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속심 터놓고 이야기해볼까 한다.

[김용필=동포세계신문 대표겸 편집국장] 나는 1997년 환경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안보 라든가 보수진영의 목소리를 내는 <신문고>라는 월간잡지사에서 기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환경운동에 더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였다. 당시는 환경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때였다. 그런데 월간 신문고와 환경단체의 고문으로 계시던 분(오제도 변호사, 이 분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거의 다 아는 유명한 분이셨음)이 1999년 9월 <사상21세기>라는 월간지를 창간하는데 필자는 <사상21세기> 편집부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당시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북한정권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보수진영이 수세에 밀리고, 북한을 포용해 개혁개방을 이끌어내자는 햇볕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다.   

 이 때 창간된 <사상21세기>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북한정권에 퍼주기 정책이라며 비판적 입장에 있는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역할을 해온 분들의 이야기 등을 실었다. 나는 당시 늘어나기 시작한 탈북자 관련 소식(황장엽 선생이 망명을 와서 오제도 변호사와 의형제를 맺기도 함)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미국, 중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한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기회도 갖게 되면서 나름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2000년 서울조선족교회에 부목사로 있던 최황규 목사(현 서울중국인교회)를 통해 국내 체류 중국동포를 위한 동북아신문을 창간하는데 함께 하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고 준비호를 만들 때부터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조선족동포를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상황을 볼 때, 나는 월간<신문고>, <사상21세기> 기자로 활동하며 나름 한국사회의 주류층을 이루고 있는, 남한의 체제가 북한의 체제보다 월등히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공산주의보다 민주주의가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보수계층을 많이 접하고 보수인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어, 나의 통일문제 접근방식도 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반대해 보수단체는 줄곧 성명서를 발표하고, 거리시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시대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도 듣곤 했다.

 한국사회는 크게 진보와 보수라는 양대 세력이 대치하고 있다. 진보도 남북통일을 이야기하고 보수도 남북통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느냐 하는 데에서 차이가 있다. 문제는 진보나 보수나 입으로는 남북통일을 주장하지만 왠지 통일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는 남과 북이 분열되어 대치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이 분열되어 있었다. 노동, 환경, 교육, 지역문제 등을 보면 좌(진보)와 우(보수)로 갈리어 첨예하게 대립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뭔가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 무조건적인 반대논리만 찾고 서로 공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생각, 한반도 통일은 요원한 것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접하게 된 조선족동포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진정한 한반도 통일을 하고자 한다면 한국사회가 조선족동포들을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사회는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온 조선족동포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교회 목회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교회 목회자들은 선교활동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속에서 조선족동포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데 앞장 섰다. 하지만 한국정부, 한국사회는 조선족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은 동포라는 인식보다 ‘외국인’, ‘중국인’이었고, 불법체류자, 외국인노동자, 조선족이라는 한국사회에서 낯설은 사람들이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한테 “한국인이면서 어떻게 해서 중국동포에 관심을 갖게 되었냐?”는 질문을 빼놓지 않고 듣게 된다. 목회자도 아닌데 일반인이 중국동포에 관심 갖고 활동해왔다는 것에 대해 잘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지금껏 나는 속심의 이야기를 드러내놓고 이야기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인 것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속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진정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조선족동포 200만을 먼저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첫 번째 해야 할 일이다 생각했고, 목회자가 아닌 일반인인 내가 한국인으로서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30대 청춘을 중국동포와 함께 하며 보내왔고, 현재 48세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예전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문을 발행하며 활동을 해오고 있다.

 지금은 한국정부나 한국사회에서 조선족동포를 바라보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경제가 급성장하였고, 다방면의 한중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족동포들의 역할이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는데다가,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이하면서 남북통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통일에 있어 재외동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조선족동포의 역할론도 대두되는 등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혼 후 처음으로 2013년 9월 7일 아내 허광옥(동포세계신문 발행인)의 고향 흑룡강성 밀산시를 방문하고, 흥개호에서 함께 아내와 찍은 사진입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2013년 9월 7일 아내 허광옥(동포세계신문 발행인)의 고향 흑룡강성 밀산시를 방문하고, 흥개호에서 함께 아내와 찍은 사진입니다.



 동포세계신문은 2011년 8월 1일자로 첫 호를 내며 창간된 신문입니다. 월 2회 격주로 발간되는 본지는 2011년 10월 27일 발행한 6호부터는 통번 256호를 병행해 쓰기 시작하다가 2011년 12월 28일 부터는 ‘통번’을 빼고 260호로 신문발행 호수를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번 300호는 50번째 동포세계신문이 되는 셈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2000년부터 국내 조선족 전문지 <동북아신문> 창간에 참여해 기자로 활동을 해오다가 2003년 5월부터는 가리봉동에 거주하면서 8월 23일 A3용지 한 장짜리 신문 <가리봉중국동포타운>을 시작으로 한 <중국동포타운신문>을 창간하고 2011년 6월 제200호를 마지막으로 하고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조선족동포를 위한 신문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기사를 발로 뛰며 직접 작성하는 것은 물론 배포까지 손수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2003년 8월 23일 한 장짜리 신문을 찍어 가리봉동 거리를 나섰을 때, 동포들이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받아들고 길 한 모퉁이에 앉아 읽는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동포 관련 신문으로 한 장 짜리 신문이 유일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신문도 있었지만, 제때 발행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한 장 짜리 신문을 매주 5000부씩 발행해 1년 넘게 돌렸습니다. 

 

 2003년 9월부터는 외국인고용허가제가 도입되어 5년 체류 미만 중국동포와 외국인노동자들이 합법화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지만, 이 방법을 안내해주는 신문이 당시에는 거의 없었고, 한 장짜리 신문이 이 소식을 알리는 주요 역할을 하였으며, 2004년 초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강한 단속바람이 가리봉동에 불었을 때도 이 한 장짜리 신문은 단속바람으로 생존권 위기에 처한 가리봉 지역상인들을 위해서도 나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문이라기 보다는 속보를 전달하기 위해 찍는 호외지와 같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신문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가리봉중국동포타운>으로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쯤 후에 가서야 <중국동포타운신문>으로 신문 명칭을 붙였습니다. 

 

 1년 넘게 찍어 돌렸던 그때 그 당시 한 장짜리 신문 자료첩을 보면, 내 인생의 정점을 찍었던 그 신문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나오게 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뿐입니다. 
 중국동포들이 대부분 불법체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함께 웃고 울었던 이 신문은, 2007년 방문취업제가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고수익을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광고를 내면 불법체류자를 대상으로 영업을 한다며 신고를 하기 때문에 광고주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아, 광고를 냈다해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나름 유력한 광고는 국제전화카드 판매회사였습니다. 국제전화카드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사서 쓰는 것이었고, 국제전화카드 사업자는 불법체류자 신고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5년 9월경 저는 한 국제전화카드 회사와 MOU(업무제휴)를 맺었습니다. 혼자 신문 기사를 쓰고 신문을 배포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일을 덜기 위해, 국제전화카드 회사와 MOU를 맺은 것입니다. 그 전화카드 회사 외에 다른 경쟁업체 광고는 받지 않는다는 조건과 역시 그 전화카드 회사도 중국동포타운신문에만 광고를 내고, 신문 배포를 맡아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계약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상호 신뢰를 지켜왔습니다.

 

 이것이 뒷심이 되어 중국동포타운신문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멈추지 않고 매월 2회씩 정기적인 간행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은 2010년 누적된 재정악화로 경영난을 맞게 되고, 경쟁 신문사들이 여러 개 생겨나는 시점이어서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과 또 신문사의 변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판단하여 외부 투자를 받아들여 주식회사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저에게 커다란 기회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고, 결국 30대 청춘을 바쳐가며 8년 넘게 만들어왔던 신문을 내주고 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 허광옥 실장이었습니다. 허광옥 실장은 흑룡강성 밀산이 고향이고 한국에 일찌감치 나와 생활을 하다가 2009년경부터 제가 하는 일을 도와나섰습니다. 그 인연으로 늦깍기 나이가 된 우리는 2011년 3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혼자 힘으로 담당하기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눠 극복하기 위한 탈출구였고, 결혼 하자마자 아내 또한 병원에 1개월 가량 입원 치료를 받아야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아내는 저에게 “지금까지 동포들을 위해 해온 일이 있으니, 사람들이 잊지 않고 알아줄 테니, 다시 시작하면 된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정적으로 무일푼인 저를 대신해 아내의 밑천으로 <동포세계신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름은 달라졌어도, 10년 전 한 장짜리 신문을 만들어 돌리던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신문이 될 것이다 생각하였고, 저의 지난 10년 활동이 과거 속으로 묻혀버리면 안된다 생각하고, <동포세계신문>이 갓 태어난 신문이지만, 10여년 넘게 오로지 중국동포와 동고동락하며 홀로 신문을 만들어왔던 그 때 그 정신을 이어간다는  취지에서 ‘통번’을 사용하게 되었고, 오늘에서야 300호 동포세계신문을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동포 희망을 선포하고 나온 동포세계신문은 중국동포를 대변하는 정론지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동포 전문지로, 한중 우호관계를 더욱 돈독히 만들어가는 가교 역할을 하는 신문으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신뢰할 수 있는 신문으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00호(2013. 9. 14일 발행) 발행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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