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황애관(黃崖關) 장성에서 본 중국의 만리장성

[김충정의 중국기행]천진 황애관(黃崖關) 장성에서 본 중국의 만리장성


척계광
(戚繼光)과 그가 만든 장성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필자 김충정 선생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필자 김충정 선생

 

 천진은 북경 왕공 귀족들의 후 화원으로 그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곳은 그래도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가 여러 번 다녀보고 감탄하여 일찍 반산이라는 곳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왜 하필 강남으로 갈을가?!”(早知有盤山, 何必下江南)라는 명구를 남긴 반산(盤山)과 척계광 장군이 구축하였다는 황애관 장성이다.


:
황애관 장성


웅위로운 장성은 산해관 발해 바다에서 출발하여
, 하나의 거룡처럼, 산을 넘고 령을 건너, 연산산맥을 뚫고, 천진의 최북단인 기현(冀縣)의 황애관에 도달한다. 이 곳에서 거룡은 머리를 높이 쳐들고, 하늘로 올라가는, 꼿꼿이 서 있는 자세로, 날카로운 발톱은 연산 산맥의 산등을 움켜지고 있어, 웅위로운 산체와 함께, 한 폭의 엄연한 화폭으로, 신성하고도, 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변한다. 이곳이 바로 기북(하북성 북부)의 웅위로운 관문 황애관이다. 황애관 장성은 북제 천보 년간(北濟天保年間) 7(556)에 수축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1400여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동으로는 마란관(馬蘭關), 서쪽으로는 장군관(將軍關)까지. 중국 고대 장성의 한 부분으로, 국보로, 진귀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황애관 장성은 30의 산속에 숨겨져 있는 바, 전 길이는 42로 기현 경내의 유일한 관성이다. 이 관성 네 주위 모두, 황갈색의 벼랑과 절벽으로 이루어졌는데 매일 석양이 기울어져 사방을 물들일 때, 절벽은 저녁 노을을 반사시켜, 만여 가닥의 금빛을 뿌리기에 만조 황애(晩照黃崖)라는 미명을 가지었다. 그러기에 이곳을 황애관이라 한다.


: 중국 만리장성 길이

 

중국의 만리장성의 길이는 통계되는 기준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만리장성은 2라고 통계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총 연장 길이는 2,11964.2만리이다. 우리가 말하는 만리란 서쪽 쟈위관(嘉峪關)에서부터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 미터 성벽을 가리킨다. 세계 7대 불가사이한 일이고, 세계 건축 10대 기적 중의 하나이다.

우주 비행선과 달에서도 확실하게 보이는 지구에서의 인공건축이라 한다.


; 중국 만리 장성의 역사
.


춘추 전국 시대부터
20여개의 제후국과 봉건 왕조가 장성을 수축했고, 20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전체 길이가 만리에 이르는 세계 가장 위대한 건축 기적 중의 하나이다. 최초의 장성은 초나라의 방성(方城), 제 나라 거방(巨防)이 있었고, 전쟁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위()나라. ()나라, ()나라 장성은 분리되어 있었으며, 연결되지 않았다. 그중 지장성 (地長城)이라고 부르는 위. . 연 삼국의 장성이 진시황 만리장성의 기초로 되었다.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고, 제후국이 할거하던 국면을 종결지어, 통일 된 봉건왕조를 세웠다. 진시황은 중원지역의 안정을 확보하고, 북방 흉노의 위협과 교란을 피하기 위하여, 몽념(蒙恬)대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몰아냄과 동시에, 큰 인력, 물력, 재력을 들여 장성을 수축했다. 통일 된 이후의 연조진 삼국사람들은 북방의 장성을 기초로 많은 부분을 확충하면서, 서쪽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고, 동쪽으론 요동까지 만 여리를 뻗어나간 장성을 수축했는데, 이것으로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웅대한 고대 건축공정이 중국북부에 있게 되었다. 중국의 진(), (), (), () 등 네 왕조에 걸쳐 수축 되었던 장성은 모두 몇 만리를 초과했는데. 그중 한대(漢代)의 장성이 가장 길다. 한대의 장성은 동쪽의 요동에서 시작하여. 서쪽은 염택까지 이르렀는데 총 길이는 2만 여 리에 달한다. 진시황은 재위 기간에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황야관을 걸쳐 북경까지의 척계광 장성


명대에 이르러 황야관의 지리 위치는 수도 경성의 요충지로 되었기에 언제나 북방 외적들의 침범을 방비하여야 하는 일로 하여 전략 지위상 아주 중요하므로
, 여러 차례에 걸쳐 수건하였다. 저명한 항왜(抗倭) 영웅 척계광은 일찍부터 기료총병(冀遼總兵)(하북성과 요녕성의 총병)으로 있었는데, 기주(冀州)16년 동안 지키고 있었다. 이 기간 척계광은 국방을 정돈하고, 왜구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방어 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일환으로는 황야관 장성을 다시 수리하는 일이다. 물론 산해관에서부터 북경까지의 장성도 척계광이 만들어 놓았다. 이 공정은 황야관 공정 중 역사상 제일 큰 규모로 상하 총동원되고, 군민이 모두 힘을 합쳐 3년 동안의 노력으로 3,025 미터의 장성을 수복하였으며, 봉황루(鳳凰樓), 팔괘가(八卦街) 및 적지 않은 루각(樓臺)들을 증건하였고, 설비가 완비한 방어 공정체계를 축조하였다.

▶사진설명: 척계광(중국어 간체: 戚继光, 정체: 戚繼光, 병음: Qī Jìgūang, 치지광[*],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은 중국 명나라 후기의 무신이다. 왜구 및 몽골과 싸워 전공을 세워 그 이름이 알려졌다.(출처=위키백과)
▶사진설명: 척계광(중국어 간체: 戚继光, 정체: 戚繼光, 병음: Qī Jìgūang, 치지광[*], 1528년 11월 12일 - 1588년 1월 5일)은 중국 명나라 후기의 무신이다. 왜구 및 몽골과 싸워 전공을 세워 그 이름이 알려졌다.(출처=위키백과)
: 척계광은 누구일까?

 

명 나라 민족영웅 항왜(抗倭)대장군 척계광의 호는 남당이다. 당시 명나라 연해지구는 늘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았다. 명조 초년에 왜구는 해적선을 몰고 중국 연해 일대에서 민가를 습격하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기에 연해지방의 일환이 되었다. 1555년 척계광이 산동 일대에서 왜구에 저항하는 데 유력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절강 해참장(海參將)으로 임명하였는 바 그곳은 왜구 활동중심 지역이였다.

척 장군은 농민과 광산 노동자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중국 남방지역에 소택지(小澤地)많은 지리적 특성과, 큰 활과 장총을 사용하는 데에 익숙한 왜구의 특점에 근거하여 적과 근접 전투를 벌이는 원앙진진법을 창조하였다. 1561년 왜구 수 천 명이 백 여척의 전함을 몰고 절강 대주지역(臺州地域)을 대거 침범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4천여 명 척가군은 신속히 적과 맞서 싸워 적들을 전멸시켰다. 그 때로부터 왜구는 척가군이란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한다. 영용무쌍과 탁월한 군공으로 척계광은 아주 빨리 승진하였으며, 척가군은 복건으로 이동해 전투를 벌이였다. 척계광과 기타 장령들의 노력으로 절강, 복건 등 연해지구는 안녕을 찾았고, 경제도 나날이 번영했다. 하기에 당시와 지금, 혹은 후세에도 인민들의 칭송을 받을 것이다.

 

2017.3.20 김충정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고문)
한국생활 10년 기념문집 '거꾸로 흐르는 압록강' 출간(도서출판 동포세계,2015), 1943년생, 길림성 용정시, 1970년 동북림업대학 림업기계과 졸업(할빈), 2003년 길림성 화룡림업국에서 정년 퇴직, 한중도시우호교류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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