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지 동포세계신문을 표방하며 나의 3번째 희망찾기 변주곡"

2017년 10월 14일자 한국일보 주말판에 게재된 사진, 외국인-한국인 가교역할 3인중 한명으로 소개된 본지 김용필 편집국장은 지난 15년간 신문을 발행하며 활동을 해왔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의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2017년 10월 14일자 한국일보 주말판에 게재된 사진, 외국인-한국인 가교역할 3인중 한명으로 소개된 본지 김용필 편집국장은 지난 15년간 신문을 발행하며 활동을 해왔다. 중국동포와 한국인의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동포세계신문의 발자취
글/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대표 겸 편집국장

"정론지 동포세계신문을 표방하며 나의 3번째 희망찾기 변주곡"

 

안녕하십니까? 제가 중국동포와 인연을 맺고 활동한 지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군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의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면 정말 많은 것이 변화해 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중국동포와 함께 가졌던 3가지 희망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번째 희망찾기
동북아신문과 서울조선족교회

2000년 말 저는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부목사로 활동하던 최황규 목사님이 조선족동포를 위한 정론지(신문)가 필요하다며 저에게 도움과 아울러 함께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저는 최황규 목사님의 제의를 거절하지는 못하고 틈틈이 신문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기로 하고 서울조선족교회를 배경으로 조선족동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2001년초 동북아신문은 4번의 준비호를 내며 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이 나올 때마다 동포들이 서울조선족교회를 점점 더 많이 찾아오게 되었고 서울조선족교회는 불법체류중인 조선족동포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시민사회단체 인권운동가로 익히 알려진 서경석 목사님은 2002년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불법체류 동포들의 구제를 위해 단식 등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불법체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십자가대행진을 벌이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시위를 하고 삭발을 하는 동포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동북아신문이 나가면서 동포들의 어려운 상황이 알려지고 서울조선족교회의 활동에 불이 지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 언론방송 기자들도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해 동포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달하였습니다.
동포들은 대부분 불법체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신문사진이나 방송화면에 나갈 것같으면 뿌엿게 얼굴을 모자이크 편집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신분 노출을 꺼려했기 때문입니다.‘동포들은 과연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았을까?’
단속을 나온 출입국공무원을 따돌리고 피해나갈 수 있었으면 그것이 천만다행이었고, 단속에 걸려 보호소에 갇혀 강제추방 위기에 놓여있다가 임금체불 문제 등으로 일시보호해제를 받고 나오면 구사일생이었습니다.
고국에 와서 따듯한 대접을 한번이라도 받아보게 되는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하던 때였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던 때였던 것입니다.
제가 조선족동포를 위한 신문에 전적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2001년 후반기였습니다.
제 나름대로 30대 들어서 소신을 갖고 남북문제와 국제관계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지만, 제가 접한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진영으로 나뉘어 이념논쟁을 벌이고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심했고, 말로는 민족통일을 주장하지만 현실을 보면 전혀 그러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이 탈냉전을 벗어났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권역 다툼은 치열하였고 그 틈새에 끼여 있는 한반도만큼은 냉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온 중국동포들을 접하면서, 대부분 불법체류자로서 언제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갖고 고국생활을 하는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갔다가 고향땅을 그리며 살다가 한중수교로 입국길이 열려 노년이 되어 찾아온 동포1세대들, 고국사회는 이들 마저 따듯하게 맞이해 주지 못하고 한(恨)에 맺혀 가리봉 쪽방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리봉동을 돌며 동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동포들은 한국인이라고 외면을 당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동포들을 위한 신문기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포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독한 코베이(술)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나만의 행복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문이 나오면 동포식당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배포하였고, 동포들은 좋은 소식이라도 듣고자 음료를 제공하며 수고한다는 말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동포들은 ‘다른 일을 해도 잘 살 수 있는 한국인 청년이 동포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며 저의 활동을 소중하게 생각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2003년 3월 동북아신문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재정도 어려운데 신문을 발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신문을 발행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덤핑 처리된 옷을 기증받아 동포들에게 호소하며 판매를 하기도하고, 신문 구독을 독려하기도 하였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동포들 편에 서서 활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일방적으로 감싸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상처를 입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불법체류 중인 동포들을 위해 활동한다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동북아신문 기자활동을 그만두고 동포활동가의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동포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최황규 목사님도 그해 5월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나와 가리봉동의 한 으슥한 골목 쪽방에 자리를 움트고 서울중국인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중국동포를 위해 활동을 했으니 앞으로 한족 중국인을 위해 목회를 하겠다며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희망찾기
중국동포타운신문과 가리봉동

 

최 목사님은 다시 나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서울조선족교회에서 동북아신문으로 못이룬 뜻을 새로운 신문을 발행해 이루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98년부터 월간지 기자로 활동해온 나를 지켜보아오던 최 목사님의 권유였습니다.
저는 가리봉동에서 신문을 창간해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하고 2003년 8월 최목사의 반칸 공간의 서울중국인교회에서 중국동포타운신문이라는 한 장 짜리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리봉동을 선택한 것은 가리봉동은 중국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동포들이 없으면 지역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리봉동은 중국 동북3성에서 온 동포들이 거주하며 한국 지역민과 함께 사는 곳이었지만 동포들 간의 싸움도 잦은 곳이었고 지역민들도 동포들이 있어야만 먹고살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동포들에 대해서 좋게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리봉동이 이럴진데 다른 곳은 어떻겠는가? 우리는 한민족이라 하면서 왜 서로 이해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가?’
가리봉동을 시작으로 하여 지역민과 동포들이 화합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실제적인 동포운동이고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문 이름을 중국동포타운이라 정하고, 고속 프린트기를 구입해 A3 한 장짜리 신문을 매주 제작해 배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이 한 장 짜리 신문이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동포신문이 10여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문이 거의 없었던 때였고 광고수익이란 생각해 보기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무슨 수익으로 신문도 만들고 활동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동포들은 제가 정부로부터 지원받아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신문사나 민간단체가 정부의 허가를 받고 지원받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자유시장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정부차원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스스로 재정능력을 갖추어 경쟁력을 갖추어나가야 한다 생각하고, 또 그 경쟁력은 동포들로부터 인정받는 신문을 만드는데 있다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 받쳤습니다.
광고수익을 올리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불법체류 신분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업체에서 광고를 내면 신고가 들어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도 있어 광고를 내고 싶어도 못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저는 중국동포에게 찾고자 하는 희망은 있었습니다.
불법체류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가리봉동에서 동포들을 감싸주고 앞장 선 것은 가리봉동 상인들이었습니다. 단속반이 들어오면 가리봉시장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생존권을 주장하며 동포들에 대한 단속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온 것입니다. 2004년 겨울엔 한밤중에 단속을 나온 출입국 차량밑 얼어붙은 땅바닥에 두러누워 단속반을 오도가도 못하게 한 용감한 상인도 있었습니다.
가리봉상인들은 저의 조언을 듣고 자체 모금활동을 펼쳐 2004년 설날과 추석명절, 그리고 2005년 추석 명절에 중국동포와 함께 하는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활동에 조선족유학생들도 자원봉사자로 앞장 섰습니다.
시위로 동포문제를 해결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문화운동으로 지역민과 함께 하는 운동으로 가리봉동을 변화시키면 중국동포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그만큼 동포정책도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가리봉동은 특수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리봉동을 동북아의 축소판, 민족통일실험마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지역민과 중국동포가 공존공생하는 마을을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을 통해 가리봉지역민과 상인들은 중국동포를 이해해 가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지역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돈으로 설명절, 추석명절 문화잔치가 열렸고,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가리봉동은 중국동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언론 방송에 가리봉동은 단골메뉴로 소개되었다. 쪽방에서 힘들게 사는 이주노동자로서 삶을 보여주는 것이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거리풍경과 먹거리 등 소개도 많아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리봉동 중심가에 중국동포타운센터를 설립하고 동포들을 위한 각종 상담과 체류지원 업무를 펼쳤습니다. 방문취업제가 도입된 2007년 9월에는 쉼터도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리봉동에서의 나의 30대 삶은 거의 신문사 사무실에서 잠을 자며 동포활동에 푹 빠져 있었던 때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동포들에 대한 저 만이 갖고 있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리봉동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을 하였지만, 2005년 이후부터 재개발이라는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지역민과 상인들도 재개발문제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동포들도 제2의 고향인 가리봉동은 곧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여 그런지 정(情)을 붙이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2011년 7월부로 저도 가리봉동에서 나오게 되었고 중국동포타운신문에서 마저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8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지내오고 만들어온 것들을 일순간에 놓고 나오게 되면서 한편으로 홀가분한 생각도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세 번째 희망찾기
동포세계와 중국동포희망연대

 

그렇다고 중국동포 희망찾기가 다 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가리봉동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중국동포의 희망을 더 큰 세상에서 찾아보고 더 큰 꿈을 가져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중국동포의 희망은 무엇인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꿈은 무엇인가? 반복적으로 생각하며 되새겨보면서 ‘중국동포희망연대’를 만들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새 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인 환경을 보면, 2007년 방문취업제 실시 이후 재한중국동포사회는 정말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중국동포 스스로 만든 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고, 동포신문도 많아졌습니다. 법무부는 업무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위해 동포체류관련 업무를 행정대행을 시킴으로써 동포체류업무를 중점으로 하는 행정사들도 많아졌고, 또 2010년 7월부터는 C-3단기복수입국 동포들을 대상으로 기술연수 교육을 시킴으로써 동포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는 학원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럼 외부적 환경은 어떤가? 중국의 경제속도는 아주 빨라 미국과 대등한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여 G-2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중국동포들은 동북3성 지역을 벗어나 한국, 일본, 미국 등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중국 내에서도 청도 북경 등에서도 중국동포활동이 눈부시고 있습니다.
이런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속에서 지난 10여년간 굳굳하게 걸어온 중국동포의 희망찾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동포세계 2011.8.1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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