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2의 고향 가리봉동, 그리고 중국동포들과 함께 해 온 가리봉동 상인

송순섭 은혜이발관 사장
송순섭 은혜이발관 사장


<본문은 2018년 가리봉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서울시, 구로구 지원)에 참가한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 임영상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주동완(재미동포, 코리아리서치 원장)이 합동취재하고 주동완 원장이 작성하여, 가리봉사람이야기(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가리봉 우마길을 쭉 따라 들어가다 보면 가리봉시장 바로 못 미처 오른쪽으로 은혜이용원이 있다. 이용원 입구에 진열된 여러 가지 이발 기구와 낡은 가죽소파가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은 흔적을 엿보이게 한다. 이용원 내부 왼쪽 벽면에는 여러 장의 이발 기술 기능대회 상장과 많은 감사장 등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있어서 수상자의 이력이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빛바랜 사진들과 오래된 신문기사들의 액자들도 이용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발사는 나의 천직
은혜이용원 주인은 1997년 한국이용사회 서울특별시연합회가 주최한 제2회 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섭사장이다. 송사장은 1956년 생으로 전라남도 강진이 고향이다. 강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가락동 시장과 용산 등지를 전전하며 이발 기술을 배웠다. 특유의 성실성과 뭐든지 빨리 배우는 송사장은 남들보다 이발 기술도 빨리 배웠고 미적 감각이 뛰어나 손님들의 머리 형태에 따라 이발을 잘 해주어 손님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송사장은 선배의 이용원을 잠깐씩 봐주기 위해 가리봉을 드나들다가 결국은 1983년 선배의 이용원을 인수하면서 가리봉동에 정착했다. 송사장이 가리봉동에 정착한 때는, 1960년대 조성된 구로공단
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도 아직은 구로공단에 많은 공장들이 남아 있어서 송사장의 은혜이용원은 젊은 노동자 손님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2018년 9월 가리봉동 은혜이발관에서 송순섭 사장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와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
2018년 9월 가리봉동 은혜이발관에서 송순섭 사장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와 주동완 코리아리서치 원장

 

가리봉동의 새로운 변화의 바람


하지만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하루가 다르게 구로공단이 변화하고 구로공단의 변화에 따라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가리봉동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새로운 일터를 따라 타 지역으로 집단 이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송사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80년 말부터... 비기 시작해가지고... 그때 당시 만해도 가리봉이 이주하기 전에는 엄청 사람이 많았었는데, 하나씩 하나씩 가기 시작하니까 다 갔어요.”
송사장의 기억에 의하면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6.29 직선개헌선언과 300만원짜리 주택을 짓겠다는 선거공약으로 대통령이 된 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지고 이듬해에 구로공단이 본격적으로 이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사장은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고 2년인가 있다가 공단을 이주를 시키기 시작했어요. 노태우 정권 때. 이주를 하기 시작하는데 어떤 식으로 이주시켰냐면요, 여기서 국가 보조를 해주겠다. 안산시 반월공단으로 이주를 해라. 그래서 많은 공장들이 보조금을 받아가지고 이주를 해나갔었어요.”라고 당시 구로공단 이주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는 그 구로공단 단지에 대단위 아파트를 지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300만 원짜리 아파트를 서민들에게 공급하려고 했다고 한다. 송순섭씨의 증언에 따른 노태우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다는 300만원짜리 주택 건설은 아래 당시의 한국의 부동산 상황과 비교해보면 ‘노태우 정부의 서민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300만 원짜리 아파트 공급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송사장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차근차근, 해나갔어요. 그 공단단지에다가 아파트를 지을려고... 근데 그게 안됐어요. 왜냐하면, 공장들이 한꺼번에 이사를 가버리면 그 공간에다가 빨리 집을 지을 수 있었을 텐데, 공장이전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구로공단의 공장이전이 몇 년이 걸렸어요. 그래 가지고 3, 4년이 지나니깐 옛 공장들 자리에 풀이 이만큼씩 자랐어요. 나무도 막 자라고... 결국은 안산시 반월공단으로 거의 다 이주를 시켰죠. 비어있는 공장이 겁나게 많았었어요. 폐허가 된 공장들이. 그런데 그 자리에 당초 계획대로 주택은 못 짓고, 여기다가 인제 현대화 해가지고 디지털단지로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구로공단 터에 대단위 서민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던 정부계획이 하루아침에 첨단 현대화 단지를 짓겠다는 계획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거주 지역이었던 가리봉동의 개발은 겉돌기 시작했다. 공단자리와 함께 대단위 아파트가 건설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가리봉동은 공단자리가 첨단 현대화 단지로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그대로 이전의 낙후된 주거지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수출의 다리
수출의 다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송사장은 가리봉동이 더 낙후되어간 원인 중의 하나로 구로동 ‘수출의 다리’ 확장공사를 든다. 구로동 ‘수출의 다리’는 1970년 12월 서울 구로동쪽과 경기 시흥 쪽(지금의 광명시)을 잇는 고가교로 만들어져 주로 주거지역이었던 시흥 쪽의 주민들이 구로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주요 도로역할을 했다. 그런데 1992년 폭 10m 길이 330m의 4차선으로 확장되어 재개통됐다. 
 이 다리 확장공사가 가리봉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송사장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수출의 다리 공사를 했습니다. 다리 공사를 했는데 그 다리가 이제 광명(당시 시흥)으로 연결되는 다리입니다. 그 다리를 공사했는데 그때는 2차선인가 그랬어요. 지금도 이제 그 다리를 보면 생각이 나는 게... 그때 118번 버스가 다녔었는데, 시흥사람들이 그 버스타고, 자전거 타고 여기 가리봉동 시장으로 왔었어요. 그 양반들이 여기서 물건 사가지고 조그만 행상 식으로 팔고 이랬었는데... 수출의 다리 공사를 거의 1년 정도 했었어요. 1년 정도 하다보니깐 그쪽에 있는 사람들도 차츰차츰 못 오게 됐고, 버스가 안다니니깐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왔다가, 여기서 또 버스타고 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 발길이 끊어졌어요. 그래가지고 광명 사거리 시장이 형성 됐습니다.”  
‘수출의 다리’ 확장 공사로 인한 장기간의 교통통제가 가리봉동의 상권에 많은 영향을 주고 결국은 가리봉시장을 비롯한 가리봉 지역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공장과 노동자들이 안산 반월로 집단이주해버려 가뜩이나 어려워진 가리봉동 경제가 ‘수출의 다리’ 확장 공사로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다. 이때 송사장도 가리봉동을 떠나려고 마음먹었었다고 한다.
 
“나도 이사를 가려고 했었죠. 왜냐면 사람이 계속 왔었는데, 다 빠져나가니깐 사람이 없잖아요. 없는데... 머리는 안산 반월공단으로 가도 쉬는 날은 찾아와요. 머리 자르러 오는데... 그것도 1~2년이지, 계속 오랫동안은 못 오잖아요. 시간 뺏기니까 못 오고... 또 오는 사람은 머리 스타일이 맞아서 찾아오는데, 시간이 지나니깐 결국은 안 오게 되죠. 그렇게 해가지고, 손님이 떨어지고... 나도 가게를 철수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위기는 바로 기회’라고 했던가... 뚝 끊어진 손님들의 발길과 매일 떨어지는 수입으로 이용원을 옮길까도 생각했던 송사장의 은혜이용원에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동포들이 송사장의 은혜이용원을 찾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들의 이발을 하면서 가리봉동에 중국동포들이 유입되는 것을 체험한 송사장은 중국동포들이 가리봉동에 들어오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정리한다.
 
“그래서 나도 가게를 옮기려고 마음먹고 다녔었는데 그러자 중국동포 분들이 한두 명씩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90년도 초반부터 한 사람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가리봉동에 중국 음식점 이라는 게 없었어요. 없었고, 삼거리 저기 도로 건너가지고 거기 한 군데 있었는데, 거기 음식점이 아주 잘 됐었어요. 한 군데... 딱 한군데 있었어요. 중국 가게들이 형성이 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도부터… 2000년도 그때는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그래 가지고 2004~2005년 정도에는 어마어마하게 들어오기 시작했죠.”

그리고 송사장은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초창기 중국동포들의 생활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때는 한국 노동자들이 공장을 따라 안산 반월공단으로 이사를 가니까 방이 많이 비게 됐어요. 그때 집주인들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공사를 했냐면, 방 3개를 뜯어가지고 하나로 크게 만들었어요. 왜냐면 살림집을 만들어야 살림하러 세가 들어온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해가지고 공사 붐이 일어나가지고, 큰 방을 만들고 막 이층집도 만들고, 입식 부엌도 만들고... 이렇게 집을 막 고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중국동포들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깐 공사하다가 중단한 거예요. 아니 공사를 안 한 거예요. 왜? 방을 세내놓기만 하면 나가니까... 또 중국동포들이 싼 방만 찾으니까 방을 크게 만들 수가 없었어요. 크게 만든 방도 나눠서 세를 놨었죠. 그렇게 됐어요. 참 가리봉 역사가 참 그래요.” 송사장은 이어서 “그때는 한국 공장을 다니신 중국동포분들이 한 집에 보통 30가구가 살았어요. 왜냐하면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을, 조금 큰 데는 비닐로 막아 가지고 세를 놨습니다. 3층이면 30집이 살았어요. 주인이 3층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그만 공간이 있으면, 비닐로 막아가지고 세놓고 살았어요. 그때 당시에 부동산도 어마어마하게 잘 됐었죠.”
라며 당시 가리봉에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동포들의 유입상황과 주거생활모습을 회상했다. 이러한 거주형태를 쪽방이라고 한다. 쪽방의 기본 형태는 ‘ㄷ’자 가옥구조에 작은 방 한 칸과 작은 부엌으로 구성되었고 공동 우물과 공동 화장실을 사용했다. 한 집에 30~50개의 방들이 있었는데 쪽방, 벌집, 닭장집이라고 불렸다. 누구에겐 야학장소였고, 누구에겐 닭장집이었고, [가리베가스]에선 꿈의 공간,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에선 소녀들이 살았던 애환의 방이었다. 그래도 그 쪽방에는 ‘꿈’과 ‘희망’이 존재했다. 1990년대 초 그러한 쪽방에 살던 노동자들이 이사나간 그 자리를 대부분 중국동포들이 차지하며, 그들의 ‘코리안 드림’을 이어왔다.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위치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이곳은 서울미래윤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관을 온다. 사진은 지난 3월 8일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방송팀 견학단, '가리봉상회' 간판이 이곳이 과거 가리봉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위치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이곳은 서울미래윤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관을 온다. 사진은 지난 3월 8일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방송팀 견학단, '가리봉상회' 간판이 이곳이 과거 가리봉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금천구는 구로노동자들과 중국동포들의 애환과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된 쪽방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2014년 2월에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을 개관했다.


송사장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중국동포들의 한국 유입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때 당시 이 중국 동포 분들이 오셔가지고... 당시 중국 동포분들이 어떻게 나왔냐면, 돈을 천만 원, 천오백만 원씩 주고 브로커로 통해서, 배를 타고 몰래 들어오고 그랬었잖아요. 그래가지고 이녁들이 주로 먹는 것은 라면, 국수... 중국동포분들이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렇게 생활하다보니 빚은 짊어지고 있고, 빨리 돈은 벌어서 갚아야 되고...”


가리봉동은 중국동포들의 제2의 고향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중국동포들이 한국을 왕래하기 시작하다가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지면서 본격적으로 한국행을 택한 중국동포들은 한국행을 일확천금의 기회로 여겼다. 이런 일확천금의 기회를 잘 이용하여 성공하는 중국동포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소수였고, 대다수 중국동포들은 한국사회에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일하기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3D업종에 종사하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어 중국의 가족과도 생이별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꿈속으로의 여행’과 같았던 한국행은 그야말로 한낱 일장춘몽에 그치고 그 깨진 꿈의 여파로 183만 명의 중국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의 조선족 마을과 사회는 산산히 부서지고, 이혼부부가 늘어 중국의 많은 조선족 가족과 가정은 파괴되고 말았다. (시사저널 1992.2.6 기사인용)
시사저널. “한국 가서 돈벌자” 중국교포 100만 대기. (1992.2.6.자 기사)
 



중국동포들이 가리봉동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중국동포들을 가장 어렵게 한 것은 먹거리였다. 아무리 같은 한민족의 비슷한 음식이라고 해도 한국 음식이 중국동포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송사장은 중국동포들의 식생활 습관에 대해서 “한국 음식이 안 맞잖아요? (그렇다고 당장 음식점을 열) 가게를 얻을 수도 없는 상태였고...” 라며 당시 중국동포들의 식생활의 어려움을 대신 이야기했다. 송사장에 따르면 중국동포에게는 한국 사람이 주로 먹는 음식이 안 맞았는데, 그 이유를 한국 사람들은 주로 채소 종류를 많이 먹는데 반해, 중국동포 분들은 생선도 잘 안 먹고 오직 고기류, 특히 양고기를 비롯한 육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서로 맞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내 거주 중국동포들이 늘어나면서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도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는데, 송사장의 기억에 당시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들의 특색은 중국에서 물건을 아예 콘테이너 박스로 들여와 팔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 내 중국동포의 증가와 함께 중국의 경공업의 생산과 수출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상품의 질은 낮았지만 싼 가격의 중국 상품들이 대량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송사장은 “(당시 무역상들이) 콘테이너 박스로 몇 박스씩 이렇게 해가지고, 중국동포들이 필요한 물품 다 가져왔어요. 뭐 하물며 땅콩, 해바라기 씨...등, 이런 거 중국동포분들이 좋아하는 거 전부. 중국동포들이 즐겨 마시는 술도  전부 싹 중국 술도 그렇게 해가지고 중국에서 가져왔어요. 그래서 이제 중국 식품점들이 생기고 한국 구멍가게는 없어지고...” 라고 이야기 한다.


아마 중국동포들이 한국내로 유입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오랜 동안 하나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중국동포들은 반세기 가까이 헤어져 있던 반가운 동포들의 귀환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언어가 통하는 중국인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더구나 1990년대 맞이한 중국동포들의 생활과 의식 수준에서 6, 70년대 한국의 모습과 정을 발견하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동포들이 한결 정겹게 느껴지면서도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좀 거부감이 생기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동포들이 가리봉이라고 하는 일정 지역에 대거 몰려드니 가리봉동의 선주민인 한국인과 이주민인 중국동포 간에 마찰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송사장은 “중국동포들은 한국인에게 좀 이질적으로 여겨졌는데, 그 분들은 중국에서 하던 습관을 그대로 했어요. 한국은 (같은 동포라도 중국과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 문화에 따라서 (중국동포들이 맞추고)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하니까, 이제 서로 싸움 났어요.”라고 말하며, 구체적으로 한국인과 중국동포 간의 문제의 발단은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한 예로 송사장은 “한국 사람이 뭐라고 얘기를 하면 중국동포들은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얘기하고, 한국 사람은 못 알아 듣잖아요? 서로 못 알아 들으니까 자기네끼리만 얘기하고... 또, 한국 사람이 중국동포에게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하면, 중국동포들은 ‘예’라고 대답해놓고 다시 중국말로 얘기하고. 그러니 서로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요...” 하며 한국인들과 중국동포들 간에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갈등의 모습을 회상했다.


 

또, <황해>, <신세계> 그리고 <범죄도시>, <청년경찰> 등과 같은 영화에서 한국 내 중국동포사회, 특히 가리봉동이 범죄가 만연한 부정적인 곳으로 그려진 것에 대해서 본인도 가리봉동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송사장의 마음도 좋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영화들의 몇몇 장면은 어느 정도 1990년대의 가리봉동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송사장 자신도 그 당시 가리봉동의 중국동포사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이렇게 이발을 하고 조금 밤늦게 끝나서 퇴근할 때쯤 되면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당시 중국동포들은 칼을 차고 다녔어요. 칼을 양쪽 발에다 끼워가지고 다녔어요. 그냥 보면 모르죠. 칼을 차고 있는지 안 차고 있는지... 이 사람들이 이발하러 오면 내가 이발을 하면서 손님들의 발을 편하게 해주려고 이발의자 앞에 있는 발받침에 발을 올리라고 했죠. 여기다가. ‘발 올리세요’ 이러고 딱 보면 칼을 딱 차고 있는 거예요.”

송사장 자신도 두려웠지만 한국 법을 모르고 흉기를 갖고 다니는 그런 중국동포들이 더 큰 일을 벌이거나 엉뚱한 오해를 받을까봐서 그런 칼 소지한 중국동포들에게서 칼을 뺐었다고 한다. 송사장은 칼을 차고 다니는 나이 어린 중국동포들을 상대한 경험담을 이렇게 들려줬다.
“나보다 나이가 적으면, ‘동생아, 칼은 가지고 다니면 안 돼’. 그러면 ‘왜 안 되냐?’고 물어요. 그리고는 ‘내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타국에 와가지고, 나는 달랑 나 혼자 왔는데 이거라도 지니고 다녀야 내가 신변보호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하고 오히려 반문을 해요. 이러면 나는 ‘이건 신변보호가 아니다. 중국은 칼을 소유해도 어쩐지 모르지만 한국은 무기를 소유하고 다니면 안 돼. 절대 안 돼. 걸려 들어가니까 이건 놔두고 가라.’ 이렇게 얘기하지... 이발을 하면서. 그러면 놔두고 가요.” 그리고 송사장은 이어서 “칼을 놔두고 갔는데 그 뒤로 다시 이발하러 와가지고 ‘형님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실상 한국에서 살아보니까 칼 빼앗은 게 참 고마운 거란 것을 알게 된 거죠. 자기들 스스로... 지금까지도 고마워하는 애들이 있어요.”
라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수시로 중국동포들을 불법체류자라고 해서 잡았다 풀어주었다를 반복해서 큰 혼란을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가리봉동의 경제도 출렁였다. 송사장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중국동포들이 많이 잡혀서 쫓겨나고... 막 이럴 때 가리봉동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지요. 왜냐하면 우리도 장사 해먹고 살기 위해서는 중국동포들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죄 안 짓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 하게끔 해줘야 한다. 이렇게 많이 얘기 했었죠. 그래가지고 단속도 일시적으로 중단 됐었고, 하다가 또 하고 그랬었지요. 또 우리 주민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죠. 단속반 들어오면 ‘중국동포들 잡아가지 마세요’ 라고”
그리고 송사장은 “하지만 중국동포들을 위해 가리봉동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한 일은 없었어요. 그냥 다 똑같이 나 같은 마음가짐으로 보호를 해줬었고, 그랬었죠. 일제단속기간이다 그러면 ‘나오지 말아라’라고 이야기 해주고 ‘뭐가 필요하면 내가 사다 줄 테니깐 얘기해라’ 그랬죠. 그럼 ‘형 그럼 라면 필요하다’고 하면 사다주고, ‘쌀 좀 갖다 줘’하면 쌀 갖다 주고, ‘김치 갖다 줘’하면 김치 갖다 주고... 그냥 단속하면 보통 일주일 집에 있으면 됐었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

송사장 본인의 직업인 이발과 관련된 중국동포들과의 경험에 대해서 물어보자, 송사장은 “중국동포들 머리 스타일이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과 달랐어요. 달랐는데 내 스타일대로 잘라주니까 맘에 드는 거지. 내가 물어보지 ‘괜찮냐고?’ 그러면 좋아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중국동포들에게는 이 스타일로 간다.’하고 계속 그렇게 잘랐죠. 다들 내가 자르는 스타일을  좋아해서 계속해서 우리 가게로 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송사장은 아직 중국을 가본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동포 손님들들이 중국어를 많이 알려주어서, 이발에 대한 중국어 단어나 간단한 인사말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무엇보다 중국동포들을 격의 없이 대우를 해줘서, 송사장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은 사람은 형님이라고 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적으면 동생이라고 해서 금방 친해진다고 한다. 송사장이 ‘동생아, 커피 한잔해라.’라고 하면 너무 좋아한다고 하면서 송사장은 크게 웃었다. 또 송사장은 찾아오는 중국동포 손님들에게 자신의 명함을 꼭 한 장씩 준다고 한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오고 자기 동생, 형 등 가족과 친구들도 소개시켜주고 또 데리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동포들은 미용실보다 이발소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미용실은 기계로 머리를 잘라서 스타일도 다르고 한데 이발소에서는 가위로 잘라주어 스타일도 더 나고 면도도 해주고 해서 이발소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중국동포들과 함께 한 은혜로운 삶

송사장은 당시로서는 조금 늦은 나이인 32살에 세 살 연하인 현재의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29살의 아들과 27살이 딸을 두고 있다. 자녀들도 모두 가리봉동의 구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가리봉동 가족이라고 한다. 이발사로서 거의 35년의 인생을 살아온 송순섭 사장은 첫 10년은 구로동 노동자들의 머리를 자르면서 보냈고 나머지 25년은 가리봉동 주민들과 중국동포들의 머리 이발을 하면서 보냈다. 주로 ‘있는 자’들보다는 ‘없는 자’들의 머리이발을 해주면서 보내온 한 평생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지내온 시간들이었다고 회고한다. 송사장 자신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형편 닿는 대로 그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온 그의 인생이 결코 헛된 인생은 아니었다.

특히 7년 전쯤 동생뻘 되는 중국동포가 심장병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고생할 때, 송사장이 나서서 한국심장재단에 요청을 하여 그 중국동포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또 다른 동생뻘 중국동포가 직장해서 일하다가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왔는데, 회사에서 1,500만원밖에 안 준다고 했다고 한다. 이 건도 송사장이 나서서 도와준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중국동포 동생이 다리를 쩔뚝쩔뚝 하면서 이발을 하러 왔어요. 어째 발을 다쳤냐고 하니까  일하다가 떨어졌다길래 돈을 얼마에 합의보자고 하냐고 물어봤더니, 산재로 처리하면 그 회사가 다른 공사 따기가 힘들다고 그냥 회사에서 1,500만 원을 준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상비를 더 받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줄테니까 네가 이거 한 가지는 해야 돼’ 하고 요령을 가르쳐줬죠. 병원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 손해사라는 사람들의 명함이 많이 붙어 있는데, 각각 틀린 전화번호 3개만 딱 따가지고 와서 네가 전화를 해라. 네가 사실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이렇게 다쳤는데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솔직히 물어봐라. 물어봐가지고 거기서 최고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해가지고 오라고 했지요. 무조건 ‘저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얘기하라고 했지요. 그 동생이 연락해보니까 실제 많이 다쳤고, 뼈도 나갔고 해서 3000만원 받게 해주겠다. 대신에 10%는 줘야 된다고 했대요. 그래서 내가 그럼 그 손해사를 나한테 연결시켜라 해서 인제 내가 전화해가지고, ‘이 동생이 일을 한 1년 못하게 되었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최고로 많이 받게끔 해주십시오.’하고 내가 부탁을 해서 그때 당시에 4,000만원 받았어요. 지금도 그 동생이 형님 때문에 많이 받아서 고맙다고 지금도 고맙다고 해요. 그때 당시 4,000만원 돈을 7년 전에 받았으니까.. 그때 그 동생은 중국에다 집하나 샀어요.”


이어서 송사장은 자신의 명함에 얽힌 사연도 소개했다.
 
“또 내가 이 명함장을 이렇게 주잖아요. 그러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딱 주며는 가다가 던져버려요. 던져버려. 근데 중국동포들은 꼭 꼭 지갑에 딱 넣어가지고 다녀요. 딱 넣어가지고 다니는데, 지갑에 있는 내  명함장을 보고 전화가 온 경우가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택시를 탔는데 지갑을 놓고 내렸다는 거예요. 택시 기사가 그 지갑을 경찰서에 가져다 준거에요. 그래서 경찰서에서 지갑에 든 내 명함을 보고 연락이 왔지요. 그 택시 기사분도 참 좋으신데... 돈 30몇 만원 들어있었어요. 옛날에는 중국 동포 분들이 돈을 은행에 저금을 잘 안했어요. 다 현금으로 가지고 다녔어요, 돈을. 50만원이건 100만원이건 다 그냥 가지고 다녔어요. 지갑에... 그랬는데 그 돈이 든 지갑을 택시에 놓고 내린 거지요. 그래서 내가 그 지갑주인 중국동포한테 연락해서 ‘너 지갑 잃어버렸냐?’고 물어보니까 ‘어저께 택시타고 가다가 빠져서 주민등록증이랑 다 잃어버렸다’고 해요. 돈도 30몇 만원 잃어버리고. 그래서 내가 ‘너 어디어디 경찰서 가서 네 이름대고 사인하고 지갑 찾아 온나.’ 했더니 그 중국동포가 가서 지갑을 찾아와 가지고는 여기서 저한테 무릎 꿇고 인사를 하는 거야.”
 
그렇게 중국동포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도와줄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도와주니까  안산으로 이사 갔어도 아직도 찾아오는 중국동포들도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보며는 내가 생각했던 바와 똑같이 중국 동포 분들이 다 마음씨 좋고, 내가 잘하면 나한테 더 잘해주려고 하고 그래요.” 하면서 송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송사장은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리봉동 주민 시설에 가서 독거노인들 무료 이발을 해주었다. 8년 6개월 동안을 재활원양로원과 노인정 등을 다니면서 노인분들의 머리를 무료로 깎아주었다. 지금도 매월 둘째 주 화요일 날 이발소가 쉬는 날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주민센터에 가서 무료 머리깎아주는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은혜이발관 출입문 위에는 방송에 나온 사진 현수막이 걸려있다.


송사장은 중국동포들에 대한 소감으로 “개인적으로 볼 때, 우리 중국동포들이 참 따뜻한 정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면서 “내가 중국동포들에게 중국에서의 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죠. 물어보면 이제 거기 생활은 조금 완전 농촌 생활하고 비슷하죠. 그렇게 생활하다가 한국에 왔으니 적응하는데 힘들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인데, 서울에는 지켜야할 것도 많다. 담배꽁초를 비롯해서 쓰레기도 함부로 버리면 안 되고, 음식물 쓰레기도 분리해야 하고, 청소도 잘 해야 되고, 길거리에 가래침도 뱉으면 안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해줘요.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해주고 또 자기들이 실상 살아보니 내 말이 맞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렇게 알고 나면 이제 그런 행동 안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직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중국동포들의 상황을 한국인들이 더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여러 번 잘 설명해주면 그들도 우리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이발원에서 송순섭 사장이 그동안 살아온 그의 인생 스토리들 들으면서, 느낀 것은 송 사장에게도 인생에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발업을 통해 많은 노동자들과 중국동포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송사장의 인생이 한 마디로 그의 가게 이름처럼 큰 ‘은혜’였던 것으로 느껴졌다. 은혜이발원에서 그들에게 이발해주면서 송사장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왔지만, 그 과정에서 송사장도 오히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은혜로운 인생 같았다. 그의 이발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상장과 감사패가 그러한 은혜로운 인생을 증명하는 듯하다.

최근에 가리봉동에는 중국동포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만큼 새로이 중국의 한족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에 대해 송사장은, “중국 한족들은 성격상 사실 돈을 안 써요. 우리 중국동포들은 돈을 번만큼 조금씩은 쓰는데, 한족들은 전혀 안 써요. 밥도 그들이 일하는 공사현장에 가면 아침도 주고, 점심도 주고 하니까 거기서 먹고 저녁에는 들어오면서 꽈배기 하나 들고 길거리 오면서 먹고 그냥 때워요. 돈 안 쓰죠, 하나도. 그런 것이 조금 그렇기 한데...”라고 말하면서 끝을 흐린다. 송사장이 흐린 말끝에서 새로 가리봉동으로 들어오는 중국의 한족들이 앞으로 송순섭 사장과 새롭게 ‘은혜’의 인연을 이어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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