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이주 한인이 일으킨 최초의 비폭력 평화 만세운동

 

3.13반일의사릉, 1919년 3월 13일 연변용정에서 3만여 명이 운집해 펼친 반일운동, 이때 사망한 14명의 무덤이 발견된 곳이다. 여러 고증을 거쳐 1990년 4월 10일 확정하고 5월 19일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첫 추모회를 가졌다. 후에 가족의 요청으로 한 명은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이곳에는 현재 13명의 묘가 있다.
3.13반일의사릉, 1919년 3월 13일 연변용정에서 3만여 명이 운집해 펼친 반일운동, 이때 사망한 14명의 무덤이 발견된 곳이다. 여러 고증을 거쳐 1990년 4월 10일 확정하고 5월 19일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첫 추모회를 가졌다. 후에 가족의 요청으로 한 명은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이곳에는 현재 13명의 묘가 있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0
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고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맞은 우리 민족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191931일 태극기를 들고 방방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세계에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유사 이래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만세 평화운동이었다.

이에 한국정부는 2017년 대통령 직속의 3.1운동100주년기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19100주년 행사를 거국적으로 치루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있다.

 

중국 연변 용정에서 일어난 3.13만세운동이다. 국가보훈처 소개에 의하면 용정의 3·13 만세운동은 한인의 이주가 시작된 이래로 간도에서 전개된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서 이 일대 한민족의 단결과 민족 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은 연변용정3.13기념사업에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1919년 동시대에 일어난 3.13항일독립운동은 3.1독립운동정신을 이어 해외로 이주한 한인들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었으며, 한족까지 감동시켜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중국 연변에서도 용정3.13운동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자체적으로 기념행사를 해오고 있고, 내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뜻깊게 기념행사를 연다고 한다.

오늘날의 재한 중국동포들도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3.13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고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3.13운동이 일어난 연변 용정 벌판 @구글이미지
3.13운동이 일어난 연변 용정 벌판 @구글이미지

 

연변 용정 3.13운동

 

지난 830일자 <길림신문>은 3.13운동을 되돌아보는 특집기사를 게재하였다.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의 말을 인용해 용정 3.13반일운동을 이렇게 소개했다.

“3.13운동은 사실상 1905년부터 준비되였는데 특히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 그 정서가 앙양되었지요. 각 학교에서는 반일교육과 민족교육을 진행하면서 인재를 양성했고 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가 나오는 즉시로 조선, 로씨야, 연변에서 함께 반일운동을 일으키기로 작심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 먼저 터졌지요. 이에 연변의 학생들은 궐기해 일어나 동맹휴학을 하면서 싸움에 나서자고 웨쳤습니다. 10여년 간 준비해 온 화산이 단꺼번에 터진 것이지요.”

 

이 말은 역사를 알면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일제는 한반도에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토지를 탈취하고, 191012월엔 회사령(會社令)을 반포 한인의 기업 설립을 통제했다.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발령해 교육 기관을 통제하고 언론·출판 통제, 일어사용 강요, 일체 집회 금지, 민족문화말살 정책 등을 순차적으로 펼쳐나갔다.

 

한반도 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려 해도 꿈쩍할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한 감시가 있었고 어떤 일도 도모하기 어려운 암흑과 같은 시대였다. 이때 민족지도자들의 선택은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가장 손에 닿는 곳은 만주와 연해주지역이다. 강과 호수, 넓은 들판이 보호막이 되어주는 곳이었다. 마적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마적떼 역시 보호막이 되기도 하였다. 척박한 땅이지만 일제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지리적 잇점을 살려 민족지도자,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고 인재양성을 위한 민족학교를 세웠다.

 

대표적인 곳이 연변 용정의 서전서숙 뒤를 이은 명동학교(연변)이고, 유하현 삼원포, 그리고 오늘날 흑룡강성 흥개호변의 밀산지역이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역사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조선족역사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3.13운동에 대한 기록은 3.13집회가 열린 장소에 세워진 비문에도 적혀 있다.

“1919313,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415일 룡정 3.13기념사업회가 세운 기념비이다. 연변에서는 이 같이 20여년 전부터 3.13운동을 기념하는 사업회가 성립되어 매년 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고 한다. 100주년을 맞는 내년에도 뜻깊은 100주년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998년경 연변일보 김철호 기자가 3.13반일운동에 참가한 한족들 사례를 상세히 소개한 기사가 지난 830일자 길림신문에도 원문 그대로 게재되어 다시 소개되어 주목된다. “3.13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3.13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족들을 반일에로 궐기시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이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하며 반드시 무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되었다. 3.13반일 운동은 연변의 반일운동을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화시켰다.”고 김철호 기자는 기록했다.

3.13만세운동의 여파로 항일독립의지는 더욱 커졌고, 일제 또한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1920년대 군대식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대적으로 물리친 전과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전사로 기록되었다.

http://www.ekw.co.kr/bbs_list.php?tb=board_mov
http://www.ekw.co.kr/bbs_list.php?tb=board_mov

 

‘3.13’ 반일운동에 참가한 한족들

(아래 본문은 1998년 연변일보에 게재된 원문그대로 2018.8.30 길림신문에도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한족들도 ‘3.13’반일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연변대학 역사학 교수 박창욱 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1919313일의 정경을 설명했다.

앞장에 선 충혈대에는 동산소학교(한족학교)의 조선인 학생과 한족 학생들이 끼여 들어 용감하게 전진했다. 조선인 학생과 한족 학생들은 어깨 겯고 구령을 부르면서 나가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고 름름했다. 군경들이 막아서자 한족 학생들이 새된 한족말로 질책했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는가! 부끄럽지도 않 은가. 량심이 있는가!”

우리와 한편이 되여 나쁜 일본놈을 쳐야지 않는가. 총부리를 돌려라!”

한족학생들의 박력 있는 질책에 군경들은 학생들의 가슴을 겨누었던 총을 내리면서 기를 죽이였다.

길회철도부설반대운동을 선도했던 관준언도 ‘3.13’반일운동을 지지했댔는데 그는 연길 북산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도 했다.

화룡현 소동구에 사는 안시영은 조선인 뿐만 아니라 한족 군중들과도 단결하고 그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여 그들을 반일운동에 궐기시켰다. 평시에 일제와 경찰들의 피해를 많이 받아온 마을의 한족 조옥재, 조옥귀, 조옥부 등 3형제는 일제와 경찰들을 극도로 미워하고 민중들을 동정한 정의감이 넘치는 지주였다. 그들은 안시영의 반일사상을 받아들인 후 그의 령솔하에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3.13’의 연장으로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련달아 일어났다. 1919316, 투도구에서 1000명 반일집회가 있었고 이튿날인 17일에 이도구에서 4000명 집회가 있었댔는데 조옥재는 소동구부근의 한족들을 이끌어 이 집회에 참가하게 했는데 무려 한족 100여명이 반일집회에 참가했다. 320, 안시영 등의 주도하에 전개된 룡두산 500명 반일집회에도 조옥재를 위수로 한 한족 민중들이 조선인 민중들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조옥재 등은 반일무장단체를 성원하여 군수물자를 운송해주었고 또 반일무장집단을 위하여 주동적으로 군수물과 군자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19209, 국민회군이 이도구일대로 전이하여왔을 때 조옥재를 비롯한 한족들은 옥수수가루 200여근, 울로초신 100컬레, 무우 두마대, 조옥재네 집에서 자래운 200여근짜리 돼지 한마리, 현금 75원을 안시영이 준비해놓은 군수물자와 함께 마차로 국민회군에 수송해주었다.

청산리전투 때에도 조옥재는 마차로 부상자를 양개골에 세운 병원에 실어오기도 했다. 192411, 국민회군이 북만으로 철회하기 위하여 과동준비가 한창일 때 소동구의 조옥재 등은 또 군수품을 직접 자기 마차에 실어 이도구에 운송하였는데 운송한 물품으로는 겨울복 240, 버선 150컬레, 토시 100, 피나무초신 250컬레, 초신 250컬레, 현금 250원이였다. 국민회군의 안무장군이 일본경찰에게 참살된 후 유해를 룡정 동산에 안치하였다. 수많은 반일청년들이 안무장군의 묘소에 와서 참배하자 일본경찰들은일이 뒤틀릴 것 같아 묘소를 옮기려고 했다. 이 때 조옥재가 나서서 집접 마차로 유해를 소동구의 내풍동에 실어왔다.

‘3.13’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3.13’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족들을 반일에로 궐기시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이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하며 반드시 무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되였다. ‘3.13’반일운동은 연변의 반일운동을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환시켰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저작권자 © EKW이코리아월드(동포세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