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에 있는 ‘발해“의 유적들



[
김충정의 중국기행=EKW동포세계신문] 중국 동북삼성에 살면서, 중국에 있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하여 모두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에 대하여 북한, 한국, 소련, 몽고, 일본, 중국의 역사학계에선 지금도 분쟁이 심하다. 각자 모두 부동한 생각들이다. 모두 어떤 생각을 하던지 간에, , 어떤 결론이 나오던지 간에 역사는 역사이고 유적은 유적이니 마멸되지 않는 것이 역사가 아닐까?!

우리들 모두는 역사 본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옳은 생각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은 꼭 정론이 나오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한국과 조선(북한)에선 고구려와 발해를 한반도 역사라 긍정한다. 또 발해 그 시기는 통일 신라와 병존한 시기였기에 남북국시대라고도 일컫는다.

 

필자가 여기에서 소개하려는 것은 발해에 대한 상식적인 내용이다. 1995년에 출간된 길림성 내부 자료 고구려발해 유적 소개(방학봉, 장월영)”를 참고로 한다.

 

一 발해의 건국과 멸망 (698~926)


기원 668(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 고구려 보장왕 26)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하여 멸망 된 후 당나라 통치자들은 고구려인의 반항투쟁을 방지하며, 고구려 옛 땅과 동북지역에 대한 저들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28000세대 20여만 명의 고구려인을 강제로 중국 전국에 유방 보내었다.

처음 시작으로는 영주(현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내주(현 산동성 연태시 萊州)에 머물게 했다가. 중국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중 약 10만명은 중국의 남방에 강제이주 당하였는데, 귀주성, 운남성, 호남성, 절강성 등지이다. 일부 문헌에 의하면 절강성 항주 부근에 박씨 마을(朴氏部落)이 있는데 모두 박씨란다. 중국 성에는 박씨성이 없는 바 오직 한민족에만 박씨성이다. 고구려 유민임이 틀림없다.

필자가 60년대 대학을 다닐 때 한 학년에 호남성에서 왔다는 박씨성을 가진 학생을 만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마을 전체가 박씨란다. 지금 생각컨대 그들도 고구려 유민임이 틀림없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중국 운남성, 귀주성, 호남성에 산재한 묘족은 고구려 후예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그럴만한 사료를 찾아보지 못하였다. 물론 동남아에 흩어진 묘족들도 포함하여 고구려 후예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추측에 불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신라고기(新羅古記)와 제왕운기(帝王韻記)에 따르면, 668년 고구려가 멸망 후,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동진하여 천문령(天文嶺)에서 당조가 파견한 이해고(李楷高)의 추격군을 격파하고, 결정적인 대 승리를 거두었다. 대조영은 계속 동진하여, 목단강 상류의 한 지류인 대석하에 림한 동모산(東牟山현 길림성 돈화시 경내) 기슭에 이르러 건국의 터전을 잡았다. 그는 698년에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이라 하고, 스스로 국왕이 되었다. 당은 705년에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라는 이름은 713, 당이 건국자인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봉해,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데서 비롯했다. 건국 초기 스스로 진국이라 칭했으며, 일본과의 사절 교환 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여 고려로 칭하기도 했다. 그 영역은 기본상 고구려의 영토와 비슷한 바, 한반도의 북부, 만주(동북 삼성), 연해주(구 소련 해삼위 일대)일대이다. 강성 시기에는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 12월부터 다음해 1월 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114일 수도가 함락 됨으로써 멸망하였다. 229년의 사직이다.


발해의 수도 변천

 

발해는 그가 존속하여 온 229년 사이에 15대를 경유하였고, 경내에 51562(51562)가 있었다. 발해는 존속 기간에 수도를 네 번 옮겼다.

첫번째는 구국(오동성.舊國:현 길림성 돈화시)에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部-오늘의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두번째는 755년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룡천부(上京 龍天府-오늘의 흑룡강성 녕안현 발해진)

세번째는 785년에 상경 룡천 부에서 동경 룡원부(東京 龍原府-오늘의 길림성 훈춘시)

네번째는 794년에 동경 룡원부에서 상경 룡천부로 옮겼다.

발해의 석탑
발해의 석탑
三 동북에 산재한 발해 유적

(1) 구국 지역 내(오동성)의 발해 유적(돈화시)

구국 지역은 오늘의 돈화시인데 발해왕조의 최초의 도읍지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구국 지역내에 유적 11. 무덤떼 1. 성터 11, 건물자리 6곳이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 한다.

1: 성산자 산성 2:오동성 3:륙정산 발해 무덤떼, 4: 영승 유지 5: <,24개돌 > 건물 자리

 

(2) 중경현덕부지역 내의 발해 유적(화룡시 서고성)

중경은 발해 5경중의 하나이며, 5경중 중간 위치에 있었다. 오늘의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으로 관할 범위는 지금의 화룡시, 룡정시, 연길시. 안도현 왕청현, 그리고 조선의 ( 북한 ) 함경북도 일 부와. 량강도 일부이다. 서고성 주변에는 20여개의 평원성과. 산성. 20여 자리의 무덤떼와. 1000여기의 무덤, 13개의 절간자리.. 교통로, 건축자리등 유지가 있다.

1: 서고성 2: 하남툰 옛 성, 3 ; 북대 옛 성, 4: 보마성 5: 송월 산성, 6:오봉산 산성

7: 룡두산 발해 무덤떼 8: 동천 무덤과 유지 9 북대 무덤, 10 :절간자리

 

(3) 동경 룡원부 지역내의 발해 유적 ;( 훈춘시 팔련성 )

동경(東京)은 발해 5경중의 하나이다. 동경 룡원부의소재지는 팔련성(八連城)이다. 팔련성은 784년부터 794년까지의 발해국의 서울이였으며, 또한 발해의 일본도(日本道)상의 교통 중추였다. 동경 룡원부의 관할 하에는 경주, 염주, 목주, 하주 등 4개 주에 18개 현이 있었다. 즉 오늘의 길림성 훈춘시와 러시아와 조선의 일부 지역이 포함 되였는바, 그들을 연결하는 삼각지대이다.

1: 팔련성, 2:온특 혁부성, 3:살기성, 4:소성자 옛성, 5:정암산성, 6:마적달 무덤탑, 7:경영 옛 무덤, 밀강 옛무덤, 고성촌 옛무덤, 8:팔련성 옛 절간자리, 9:신생 절간자리, 10:5.1 절간자리

(4) 상경과 그 부근의 유적 ( 녕안현 발해진 .지금의 동경성 부근 )

상경 룡천부는 162년간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 료나라 ( 거란 ) 통치

자들은 발해 인들의 반항 투쟁을 막기 위해 928년에 동단국의 수도를 천복성( 발해때의 수도) 으로부터, 동평 ( 오늘의 료양 ) 으로 옮겼다. 그때 료 나라 통치자들은 천복성을 몽땅 불살라 페허로 만들고, 그곳주민마저, 료양 일대로 강제 천이 시켰다. 상경은 심한 파괴로 하여 오래동안,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청나라 초에 이 웅대한 궁성 유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청조 말년과 민국 초년에 사학가들의 고심한 답사와 세밀한 고증을 걸쳐, 발해 상경유지라는 것이 증명 되었다.

1:상경성(외성, 내성, 궁성, 궁성성벽, 팔보유리정, 절간자리) 2:성장 립자산성 3:남호두옛성(南湖頭古城) 4:남성자 옛성(南城子古城) 5:삼령무덤(三灵墳)

(5) 서경압록부지역내의 발해 유적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5경 가운데 하나이지만 수도가 아니다. 서경압록부의 산하에는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 네 개의 주가 있었다. 서경압록부의 소재지는 신주(神主-오늘의 림강진)이다. 신주의 대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강군(中江郡)이다.

1:신주의 옛자리, 2:신안 옛성, 3:영안 유지, 4:대영 유지, 5:림성 옛터, 6:하남툰 유지, 7:육도구 동광 유지, 8:령광탑

 

끝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내일이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고문,

1943년생, 길림성 용정시, 1970년 동북림업대학 림업기계과 졸업(할빈), 2003년 길림성 화룡림업국에서 정년 퇴직, 한국생활 10년 기념문집 '거꾸로 흐르는 압록강' 출간(도서출판 동포세계,2015)


 

저작권자 © EKW이코리아월드(동포세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