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와 순애보 결혼해 임신까지 했지만 ... 한국에 먼저 온 남편의 “있을 수 없는 배신, 피눈물 난다해….”



절망의 폭풍우를 뚫고 찬란한 희망을 비추는 한 중국여성 이야기

[서울=동포세계신문] 1990년대 후반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북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갔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굶주린 백성들은 살기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동북삼성으로 수십만 명이 탈북 해 잠입해 들어왔다. ‘꽃제비가 된 아이들도 넘쳐났다. 당시 중국동포들은 이런 탈북자들을 품어주고 먹을 것을 주며 돌봐주었다.


 중국여성 조리휘(49·한국명 조미선)가 탈북자를 만난 것은 이때다. 그는 당시 큰 기업에서 회계일을 보고 있었다.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술과 도박 등에 빠져 지내 헤어졌고 아이를 홀로 키우며 살고 있었다. 길림시에서 남동생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운명의 탈북자가 이 공장에서 기거하며 일을 했다. 동생 공장을 늘 찾아가 도와주던 그가 탈북자 진 모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진씨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었다. 진씨는 성실했다. 조씨에게 연정을 느낀 진씨는 구애를 했고 청혼을 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탈북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있어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동생이 이런 상황을 알고는 분노했고 진씨를 공안에 신고해 북한으로 추방시키려고 했다. 북한으로 보내지면 결과는 비참한 것. 결국 그는 탈북자 진씨를 구하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직장을 떠나 길림시에서 장사를 하면서 진씨와 살았다.


 부부가 되었다. 그는 근본상 마음이 따듯한 여성이다. 그는 남편을 위해 중국 호구를 사서 탈북자중국인으로 만들었다. 남편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나와 남동생과 함께 탈북했다. 누나는 중국인에게 팔려갔고 그는 돈을 주고 다시 남편의 누나를 살려내었다. 대다수의 탈북자가 그렇듯이 남편은 한국행을 간절히 원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원하기에 그는 동의했다.


 그는 남편의 한국행을 동행했다. 중국의 남방으로 향했다. 동남아 국가로 간 후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공안에 잡혀 내몽고 감옥에 갇혔다. 내몽고의 겨울 추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춥다.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남편은 도문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는 한 달 만에 내몽고 감옥에서 나왔다. 그 후 남편은 북한으로 추방되어 감옥에서 살았다. 감옥에서 남편은 폐결핵이 심하게 걸려 전염을 우려한 북한 당국은 남편을 석방했다. 이제 남편은 병으로 죽는 길만 남았다.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었다. 남편은 조리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안타까운 상황을 안 그는 중국에서 약을 사서 보낸 후 탈북자금을 마련해 남편이 다시 중국으로 오게 했다. 소고기가 폐결핵 회복에 좋다고 해 소고기 한 마리 분량을 남편에게 먹였다.


 남편은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행을 시도했다. 누나와 남동생과 함께. 세 명의 한국행 비용도 조리휘가 마련해 주었다. 말 그대로 순애보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순정한 사랑과 희생이었다. 탈북자 남편과 남매는 2005년 드디어 한국행에 성공했다.
 
중국에 홀로 있던 조씨는 임신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남편도 기뻐했다. 남편은 한국국적을 얻었다. 국제결혼수속을 진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뜸해졌고 후엔 연락도 없어 조씨가 전화해 물어보니 바빠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한국에서 이미 젊고 예쁜 탈북여성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배신과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자
: 한국엔 언제 왔나?

조리휘(이하 조): 국제결혼비자가 나와 200788개월 된 아들을 등에 업고 남편을 만나러 왔다. 그러나 공항에서 만난 남편은 예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싸늘한 시선으로 성가신 존재가 자신 앞에 나타난 듯 대했다. 그는 내가 한국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 도로 중국으로 가서 살라고 했다. 그리고는 대전인가 어느 지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아이만 데리고 혼자 가버렸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앞이 캄캄했다. 정말 피눈물이 났다.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남편 누나 집을 찾았다. 아이가 하도 우니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누나 집으로 왔다.

 

기자: 그 후 어떻게 되었나?

: 남편 누나와 남동생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이미 다른 탈북여성과 살고 있었다. 다시 합류해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잊으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잊을 수 있나? 나는 남편과 두 남매를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쳤다. 이국타향인 한국까지 왔다. 왜 왔겠나? 남편을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내가 중국에서 있었다면 생활상 어려움은 전혀 없다. 다만 남편과 재회하기위해서 온 것이다. 결국 나는 철저히 버림받았다. 살수가 없었다. 남편과 남매는 나를 내쫓았다. 이 생각만하면 지금도 마음이 찢어지는듯하다. 결과적으로 남편은 나를 한국행을 위한 수단, 사다리로 이용하고 버렸다.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나?

 


기자
: 서울중국인교회를 찾았다고 하는데

: 난 정말 오갈 데가 없었다.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노숙자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한 여행사를 통해 서울중국인교회를 알게 되어 전화했다. 그 후 서울중국인교회(최황규 목사)는 나의 피난처가 되었다. 교회 피난소에서 1년여 간을 살았다. 나는 증오심에 부글부글 끓었다. 남편을 죽이고 나도 아이와 함께 죽으려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마다 최 목사님은 나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원수를 갚지 말라.”는 성경을 들려주었다. 나는 이런 성경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날마다 성경을 읽고 외우며 증오심과 괴로움을 잊으려고 했다. 내 인생에 가장 혹독한 절망이요 배신이자 인생의 광풍이요 캄캄한 밤이었다.

 

기자: 당시 무슨 일을 하며 지냈나?

: 중국에 두고 온 큰 아들과 한국에 데리고 온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일도 해봤고 이런 저런 일도 해봤다. 그러나 가장 오래한 일은 현장 일이었다. 여자로서 하기 힘든 어렵고 위험한 일도 했다.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두세 개 끼고 하는 일도 했다. 주위의 중국여성들이 마사지를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권유도 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권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내가 올바로 살지 않으면 내 두 아들도 올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그런데 내가 아들을 두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나는 힘들어도 건강하고 건전한 일을 했다.

 

기자: 기억에 남은 일이 있나?

: 아들이 네다섯 살 때다. 내가 현장 일을 다녔기 때문에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아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엄마인 나를 구로공원 공중화장실에서 기다렸다. 우린 이렇게 살았다. 다행히 이젠 두 아들 다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니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절망의 때에 나를 품어준 서울중국인교회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기자: 중국식당으로 성공했다. 식당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 현장 일을 하다 성실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사정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그와 함께 결혼해 살기로 했다. 중국에 있는 모친과 형제들에게 가서 남편을 소개했다.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겪은 일들을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토로했다.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 내 남동생이 특별히 강조했다. 한국에 가면 다시는 현장 일하지 말고 가게를 하라고. 그래서 남편이 가진 돈 얼마와 내가 가진 돈 얼마 등을 보태 건대입구역에 있는 광진구 자양동 양꼬치거리에서 중국식당을 열었다. 원래는 대림동에서 할려고 했는데 임대료와 권리금이 너무 비싸 건대입구 쪽으로 갔다. 나와 남편은 열심히 일했다. 음식 맛이 좋아 손님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중국식당 네 개와 만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식당을 연지 4년만의 일이다.

 

기자: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며 살려고 한다. 특별히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중국인들을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되는 대로 섬기려고 한다. 결혼이민 중국여성들의 자녀들을 위한 무료 중국어학습반(서울중국인교회)도 돕고 있다. 앞으로도 형편이 되는 대로 천천히 사업을 확장하려한다. 사업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결혼이민중국여성들의 피난처이자 친정집이 되어준 서울중국인교회
 

1992년 한·중 수교이후 중국여성들과 결혼하는 한국남성들이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국제결혼과정에서 제도와 법이 불완전해 한국으로 결혼해온 중국여성들이 겪는 피해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국제결혼 브로커들이 저지른 인신매매성 국제결혼 행태는 많은 중국여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 한국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어디에 가서도 하소연을 하지 못하는 결혼이민 중국여성들이 서울중국인교회로 몰려들었다. 성폭력, 가정폭력, 사기결혼, 남편의 사망 등. 서울중국인교회는 이들의 눈물과 고통을 함께하면서 제도개선을 해나갔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중국여성이 위장결혼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황망해할 때 결혼이민 역사상 최초로 헌법소원을 제기해 무죄를 입증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울중국인교회는 결혼이민중국여성들의 피난처이자 친정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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