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사의 청나라는 왜 신식군대를 만들었나?


[동포세계신문=김충정 편집고문] 중국 근현대사에서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와 모택동의 할빈군공대학(哈軍工. 1970년 할빈군사공정학원 공군공정학원 전체가 서북공업대학에 이주 합병되었음)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시대와 중화민국 시대 중국의 신식군대 최초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천진(天津) 소참(小站)의 신군병영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一 : 황포군관학교.

중국 국민 혁명에 필요한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국공합작기간에 손중산이 1924년 1월 광주(廣州) 황포도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최고 운영 기구는 교본부였다. 책임자로는 순원(손중산), 장개석, 료중개이고, 엽건영은 교육부 부주임, 등영달은 교련부 부주임, 주은래는 정치부 부주임 등 중국공산당 중견인들이 교사로 있었다.
교장은 장개석이다. 황포군관학교 필업생들은 항일 전쟁시기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고급 장령들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마멸할 수 없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잃었던 내 나라를 찾겠다고 한반도에서 열혈 청년들이 중국으로 들어 갔는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황포군관학교에 다녔다.

二 ; 할빈군정대학과 서북공업대학
 
할빈군정대학은 신중국 초기에 흑룡강성 할빈에 설립한 대학으로 학생들은 기본 현장(縣長 ) 이상 간부들의 자녀들로 중국인민해방군 고급 장령들을 배양하는 학교였다. 1966년 문화 혁명 전 만하여도 중남해에 있는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자녀들 대부분이 이 학교에 다녔다.  모택동 주석의 조카, 림표의 딸, 주덕의 손자, 진의의 아들, 류소기의 아들. 화룡의 아들 ...이 학교는 1970년 서북공업대학에 이주 합병되었다.


 
三 ; 중국 신군(中國新軍)의 발원지 소참 


 천진시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약 100km 달리면 진남구 소참진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곳이 국내외에서 유명한 중국신군의 발원지 소참 련병원(練兵圓)이다.
 (1) 개요:
소참 련병원은 중국 최초, 새롭게 건립된 신식 육군(陸軍)의 탄생지로, 중국 군사 문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둘레의 높은 성곽 안팎을 돌아보노라면 그 때 그 시기 중국 신식 군대의 어려운 역사를 돌이켜 볼 수 있다. 소참 련병원은 국가 3A 유람지로 부지 면적은 400무이고, 총  건축면적은 8.77만 평방미터이다.
지금 이전의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축으로는 강무당(講武當), 독련 행원(督練行轅). 신군독련9대처(新軍督練 九大處). 행영매매가(行營買賣街)이다.
 근래 신설한 다른 건축으로는 풍모 건축 유람구와 복가상업 유람구이다.

 
(2) 청나라 후기 신군을 왜 만들었을까?
“낙후하면 얻어 맞는다” 는 말이 있다. 고금중의 철두철미한 도리이다. 청나라 말기 청군은 구식무기, 즉 랭무기(冷武器)ㅡ 칼, 창, 궁, 전(刀,矛,弓,箭)을 사용하였다. 반면 당시만 하여도 서구 열강들은 열무기(熱武器)ㅡ대포, 총. 군함 등을 사용하였다.
 1640년의 영국의 자산계급혁명은 세계역사가 자본주의 시대에 진입함을 표지한다. 자산계급혁명과 공업혁명의 흥기로 서방 자본주의 국가는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세계에서 자본주의 물결이 거세게 앞으로 나아갈 때 청나라 통치자들은 천자의 나라 “천조지국(天朝之國)”, 즉 세상의 중심이라 자존하며, 맹목적으로 자고자대하고 관문을 닫아 걸어 서방 열강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 지게 되었다. 열강들은 끊임없이 아편을 중국에 가져가 중국사회에 엄중한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1840년 영국은 중국에서 아편금지를 구실로,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대문을 열려고 타산하였다. 이리하여 열강의 함포사격 공세 하에 중국의 이 <천조지국>이라는 큰 빌딩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1856년 제 2차 아편전쟁이 폭발하였다. 그 후 4년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선후로 광주, 대고(大沽), 천진, 북경 등을 공점하였는데 북경의 원명원을 불 사르고 약탈하였다. 
 1894년에는 중일 갑오전쟁이 있었다. 전쟁 기간, 참전한 중국 육군은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홍장(李鴻章)이 거느린 회군(淮軍)은 전군이 복멸되었다. 갑오전쟁에서 참패는 사람들의 심령에 상처를 주었고, 서구식 선진 장비와 낙후한 구식 군사제도 간의 거리와 첨예한 모순을 폭로하였다. 청 정부 조야 모든 사람들은 낙후하면 얻어맞고, 강대한 국방건설과, 정규화 군대가 없으면,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청 정부는 신군을 건립하였는데, 이름을 완무군(完武軍)이라 하고 독일 교련을 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천진 소참은 이때부터 중국 신식군대의 발원지가 되었다(1875~ 1920)
 1895년 12월 16일 원세개(袁世凱)는 정식으로 완무군을 접수 하였는데, 이름을 <신건육군>이라 개명하였다.
 1900년에는 8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점하고, 청 정부를 협박하여 치욕스럽고도 불평등한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하였다.

(3)구식군대에서 신식군대로
 원세개가 소참에서 <신건육군>을 건립한 후 “국방의 강성, 군대의 강대가 있어야 국가의 강성이 있을 수 있다” 라는 표어를 군훈으로 삼고. 구식 군대를 신식 군대로 배양하였다. 이렇게 되어 소참 련병원은 당시 세계상 가장 선진적인 독일 군대의 건제를 람본(藍本)으로 당대 선진 군대의 기본인 조직편제, 군관 임명과 배양제도, 훈련과 교육제도, 입군제도, 무기제도, 후근제도 등 적지 않은 신군대 사상을 체계적으로 관철 집행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국 군대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4) 중국근대사에서 소참의 위치
 <신건육군>이 천진 소참에서 중국 근대 군대의 훈련기지와 학교로 된 후, 소참은 중국 신식 군대의 발상지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 군대의 냉병기로부터 열병기로의 진화과정을 완성하였다. 이로부터 서구열강들 혹은 세계지도에는 소참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었다. 천진이라는 지명이 없을 때가 있지만 소참이라는 지명은 항상 있었다. 소참에서 북양정부 4명의 총통, 한 분의 임시집정, 9명의 정부 총리. 30여명의 독군 등 20세기초 중국의 정치와 군사 무대에서 혁혁하게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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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고문,

1943년생, 길림성 용정시, 1970년 동북림업대학 림업기계과 졸업(할빈), 2003년 길림성 화룡림업국에서 정년 퇴직, 한국생활 10년 기념문집 '거꾸로 흐르는 압록강' 출간(도서출판 동포세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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